삶의 시간을 직조한 소설집 『물의 시간』 출간한 소설가 연용흠
연용흠 소설가가 묵직한 세 번째 소설집 『물의 시간』을 어은당에서 펴냈다.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허상의 뼈’로 등단한 뒤 40여 년간 창작과 교육 현장을 지켜온 그는 이번 신작에서 시간의 철학과 인간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는 문학 세계를 다시 한 번 정교하게 확장한다. 소설집의 전편에는 ‘시간’이라는 단일 축이 일관되게 흐르며, 과거의 기억에서 현재의 감정, 그리고 미래 아포칼립스 세계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표제작 ‘물의 시간’을 비롯해 ‘불의 시간’, ‘흙의 시간’, ‘나무의 시간’ 등 오행 사상을 변주한 작품군은 인간의 인연과 업(業),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원리를 사유하게 만든다. 작가는 서문에서 “나에게 신은 사랑이 아니고 시간이다”라고 적으며, 이 선언을 통해 전체 소설집을 관통하는 미학적 중심을 제시한다.
첫 작품 ‘별의 주인은 누구인가’에서는 삼촌의 출생을 둘러싼 비밀, 별과 뱀, 생멸의 은유가 겹겹이 배치되며 독자를 긴장감 속으로 끌어들인다. 가족사와 신화적 모티프가 중첩되는 독특한 구조를 통해 “개인의 시간은 곧 우주의 시간”이라는 주제가 촘촘하게 드러난다. 이어지는 ‘흙의 시간’은 대가족의 관계 속에 자리한 출생과 죽음, 사랑과 상처를 흙의 감촉처럼 온기 있게 비유하며, 독자가 자신의 삶의 풍경을 자연스레 돌아보도록 이끈다.
후반부의 ‘라스트 컴퍼니’는 기존 작품과 결이 다른 SF 단편으로, 아포칼립스 이후의 지구를 배경으로 인간 존엄과 생존의 질문을 제기한다. 이는 원로 작가의 문학적 지평을 확장한 실험적 시도로, 다양한 세대의 독자층에게 신선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만한 구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인공지능이 감정·목소리·영상을 복제하는 시대에도 문학이 탐구해야 할 영역은 “AI가 결코 모사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성”임을 강조한다. 특히 단편 ‘소금꽃’에서 선보이는 서사 리듬과 마음의 결을 따라가는 문장은 독자에게 정서적 여운을 남긴다. 시인 양애경이 “유미주의에 가까운 치열한 미의식 속에 야생의 날카로움이 공존한다”고 평한 대목은 연용흠 문체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소설집의 특징은 화자들이 시대와 나이를 넘나들며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작품은 특정 세대에 국한되지 않고 세대를 관통하는 공감 서사를 구현한다. 부당함과 모순이 많은 현실 속에서도 인간 존엄과 삶의 흔적을 잔잔히 찾아가는 인물들은 작품 전체에 따뜻한 윤기를 더한다.
『물의 시간』은 인간의 미세한 감정과 시간을 관통하는 철학을 섬세하게 짜 올린 여덟 개의 기록이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잊고 지냈던 감정의 결을 되살리고, 시간의 빛과 그림자 속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는 경험을 만나게 된다.
■ 작가 소개
연용흠은 대전 출생으로 한밭대학교에서 전기·전자공학을, 원광대·한남대 대학원에서 교육방법과 국어교육학을 전공했다.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했고, 소설집 『그리하여 추장은 죽었다』, 『코뿔소 지나가다』, 『물의 시간』, 시집 『소금밭에서 배꽃 보다』, 『뿔에 관한 소고』 등을 발표했다. 전 대전소설가협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충남시인협회 이사로 활동하며 강의와 창작을 병행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석사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