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동물은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4만년 역사 되짚기
신간 '야생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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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출판사 제공]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오래된 시계와 촛대가 있는 실내 공간에 거대한 몸집의 멧돼지와 머리를 땋은 소녀가 함께 있다. 멧돼지는 빵 조각이 흩뿌려져 있는 나무 탁자 위로 앞발을 올리고 있고, 소녀는 큰 빵 덩어리를 손에 들고 멧돼지를 바라보고 있다.

기묘하고 비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묘하게 자연스러운 이 한 장의 흑백 사진을 본 영국 작가 케기 커루는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이미지에 매료돼 인간과 동물의 오랜 관계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

그 결과물인 신간 '야생의 존재'(가지출판사)는 인간이 문명사를 일구기 시작한 4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관계 맺어왔는지를 담은 방대한 책이다.

책의 표지이기도 한, 폴란드 동물 사진작가 레흐 빌체크의 1970년 사진 속 소녀는 빌체크의 동반자였던 동물학자 시모나 코사크, 멧돼지의 이름은 자브카다.

지금 우리에게 멧돼지는 '도심 출현', '경작지 습격', '아프리카돼지열병' 등의 키워드와 함께 자주 등장하지만, 사람들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외딴 숲에서 야생동물과 어울려 살았던 코사크에게 자브카는 가족과 다름없는 동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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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지금처럼 야생과 멀어지기 전 먼 과거,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물 중 하나에 불과했을 때 인간과 동물은 그저 지구를 공유하는 동반자였을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했는데, 대체로 인간이 우위를 점하는 방향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인간은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유용한 특성을 가진 동물만 선별적으로 번식시키고 그렇지 않은 개체들은 가차 없이 도태시켰다. 고기, 단단한 체격, 풍성한 털, 뛰어난 적응력, 온순한 성격과 같은 특성이 선택의 기준이 됐다."(47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사다리'에서 동물을 인간의 하위에 자리하게 했고, 데카르트는 동물을 영혼 없는 존재로 봤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간이 동물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진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에 빗대 '님 침스키'라고 명명한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치던 70년대 실험 '님 프로젝트'는 인간이 철저히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기준으로 동물을 탐구했던 시도의 대표적인 사례다.

태어나자마자 강제로 어미와 이별하고 인간 아이처럼 자란 님은 4년간 125개의 수화를 익혀 여러 조합으로 사용하는 등 습득 능력을 보였으나 연구자가 유도할 때만 반응을 보였을 뿐 진정한 대화를 나눈 게 아니었다는 자성이 뒤늦게 나왔다.

연구 대상으로만 살던 님이 26세에 심장마비로 숨진 후 그를 돌봤던 사람 중 하나는 "우리는 한 존재에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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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 식히는 DMZ 고라니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후에도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어긋나기만 했다.

공유지인 자연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경쟁 속에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계속 멀어졌다. 동물을 먹는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노력은 작아졌고, 가책은 가벼워졌다.

"무기가 정교해질수록 사냥감과 직접 마주할 일은 줄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자연으로부터 한 걸음 더 멀어졌다. (중략) 끝도 없이 이어진 살육의 역사, 갈수록 교묘해진 방식. 그 앞에선 피할 길도 숨을 틈도 없다. 인간의 생태적 양심은 진화할 시간도 없었다."(353∼354쪽)

한번 어긋한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는 동안 이를 다시 이으려는 시도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멸종위기에 놓인 동물을 복원하고 야생동물 밀매를 감시하는 등의 '리와일딩'(rewilding·재야생화) 운동이 그것이다.

책 말미에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동안 야생 동식물의 안식처가 된 비무장지대(DMZ) 사례도 등장한다.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장소가 동물에겐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고, 이곳 동물의 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것이 한반도의 평화, 즉 인간 입장에서의 평화라는 아이러니가 인간과 동물의 어긋난 관계를 극명히 보여준다.

서울대 동물병원에서 수련 중인 수의사 정세민 씨가 우리말로 옮겼다.

708쪽.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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