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일보 소개

참 좋은 세상에서 그리 살라고 했건만... 쯧!

 

산문에서 바라보니, 참, 세상이 어수선하기만 하다. 2천5백여 년 전, 부처님이 이 땅 사바세계에 오셔서, 여기가 원래 정토요, 낙토이거니, 그렇게 좋은 세상에서 살라고 고구정녕(苦口丁寧)하게 당부를 하셨건만, 정작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예토요, 혼탁하기만 하다. 

『화엄론(華嚴論)』에서 말했다. “시방세계는 허공과 같아서 그대로 부처의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과 중생과 마음의 경계가 서로 상응하는 바가 마치 그림자가 겹치는 것과 같다. 부처가 있는 세계니 부처가 없는 세계니 말하지 않으며, 상법시대(像法時代)나 말법시대를 설하지 않는다. 이러한 때가 바로 항상 부처의 시대이고, 항상 정법시대라고 설하는 경이 요의경(了義經, 진실하고 극진한 구경의 진리를 말씀한 경전)이다. 그러나 이쪽은 예토이며 저쪽은 정토이고, 부처가 있는 곳과 부처가 없는 곳, 상법시대와 말법시대가 있다고 설한 경은 모두 불요의경(不了義經)이다.”

안타깝구나. 참 좋은 세상 정토는 여기도 되고, 저기도 되는데,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저기, 강 건너에 정토가 있다 하고, 강 건너 사람은 또 여기가 정토라 하고 티격태격 영일이 없다니! 강 건너라고 해서, 어찌 남이 땅이랴. 강 이쪽이라고 해서 어찌 저들의 땅이 아니랴.  당초 내 땅, 네 땅이 어디에 있었더란 말이냐. 허구헌 날 천국을 지옥으로 살고 있다니, 어찌 답답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우리 해동 화엄종의 개조 의상조사(義湘祖師)께서 〈법성게(法性偈)〉를 지어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相共和)"라,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니 항상 함께 한다고 하였다. 또 우리 근대불교 중흥조 경허(鏡虛)조사께서 〈참선곡〉에서 노래하기를, "삼계대사 부처님이 정령히 이르사대/마음 깨쳐 성불하여/생사 윤회 영단(永斷)하고/불생불멸(不生不滅) 저 국토에/상락아정(常樂我淨) 무위도(無爲道)를/사람마다 다할 줄로/팔만장교(八萬藏敎) 유전(有傳)이라." 하였고, 『유마경』에서 일렀으되, "높은 언덕과 육지에는 연꽃이 나지 않고, 낮고 습한 진흙에 연꽃이 난다."라 하였고, 또 "종자를 허공에 심으면 나지 않지만, 똥과 흙이 있는 땅에서는 능히 무성하게 자랄 것이며, 번뇌의 큰바다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일체 지혜의 보물을 얻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무엇을 더 망설일 것이겠는가. 출세간과 세간이 어찌 따로 있겠느냐. 이것도 하나의 수행의 한 방편이거니, 부디, 저 고달픈 중생'부처님'들에게 갠지스강 강변 모래알 하나같은 보탬 하나라도 되기를 바랄 뿐이다.

『대승기신론』에서 “일체법은 본래부터 언설의 모습[言說相]을 여의었으니, 오직 한마음[一心]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여(眞如)라 한다.”라고 하였다. 말인즉, 진여란 말을 떠난, ‘이언진여(離言眞如)’이다. 진여를, 참 좋은 세상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일체법은 말로 설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이름할 뿐이다. 아무리 그러하기로, 그 세상을 말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저 어지러운 중생을 깨우칠 수 있겠는가. 언설을 거부하지만, 거부하는 몸짓도 언어의 외피를 빌리지 않고는 표현할 수가 없다. 말인즉, ‘의언진여(依言眞如)’이다. 비록 방편시설(方便施設)이지만, 혹은 언설을 빌린 가설(假設)이지만, 언설로 말할 수밖에 없다. 또 『유마경』에서 말하기를, "언설과 문자가 다 해탈의 모습"이라 하였고, 이어서 "문자를 떠나서 해탈을 설함도 아니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이 해탈의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우리 시대의 최고 강백 무비스님은 "궁극적 명품불교는 그 어떤 경지라 하더라도 지금 현재 존재하는 이대로의 현상에서 떠나 있지 않음을 가르친다."라고 해설하였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꺼나. 우리 해동이 낳은 저 위대한 사상가 원효대사(元曉大師)의 다음 언술로 대신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마음의 본성은 원융·회통하여 걸림이 없다. 얼마나 큰가 하면 허공처럼 크고, 얼마나 깊은가 하면 큰 바다처럼 깊다. 허공과 같으므로 그 본체가 평등하여 이것이다 저것이다 가릴 것이 없는데, 어찌 깨끗한 곳과 더러운 곳이 있겠는가. 그리고 큰 바다와 같으므로 그 본성이 매끄럽고 윤활하여 인연을 잘 따라 거스름이 없는데, 어찌 움직일 때와 멈출 때가 없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육진(六塵,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 즉 눈[眼根]ㆍ귀[耳根]ㆍ코[鼻根]ㆍ입[舌根]ㆍ몸[身根]ㆍ뜻[意根]이 인식할 수 있는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 등 여섯 가지 상대적 경계)의 바람으로 말미암아 오탁(五濁, 말법 세상에 나타나는 다섯 가지 더럽게 물든 현상)의 악세에 빠져서 헤매고, 고해의 물결에 잠겨 길이 떠돌아다니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선근을 이어받아 사류(四流, 네 가지 번뇌의 격심한 흐름)를 끊어 되돌아오지 않고, 피안에 이르러 영원히 고요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움직임도 고요함도 모두 한낱 커다란 꿈이로구나!

공덕을 쌓아야 깨닫는다

깨달음의 경지로 이것을 말하면, 차안도 없고 피안도 없구나! 예토와 정토가 본디 한마음이므로 생사와 열반은 마침내 둘이 아닐세! 그러나 근원으로 돌아가 대각(大覺)을 이루는 것은 공덕을 쌓아야만 얻을 수 있다. 물결을 따라 떠다니면서 긴 꿈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는 단박에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이 드리운 자취는 먼 것이 있고 가까운 것이 있으며, 베푸신 가르침은 혹은 칭찬하고 혹은 폄하한 것이 있다.

석가모니 세존께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오악(五惡, 다섯 가지 나쁜 행위)을 훈계하시고, 선을 권장하며, 아미타여래께서 안양국토(安養國土, 아미타불의 정토인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세 무리의 중생(三輩,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세 무리)을 인도하여 왕생하게 한 것에 이르기까지, 이들 방편[權]의 자취[迹]는 모두 진술할 수 없다.

然夫衆生心性。融通無?。泰若?空。湛猶巨海。若?空故。其體平等。無別相而可得。何有淨穢之處。猶巨海故。其性潤滑。能隨緣而不逆。豈無動靜之時。爾乃或因塵風。淪五濁而隨轉。沈苦浪而長流。或承善根。截四流而不還。至彼岸而永寂。若斯動寂。皆是大夢。以覺言之。無此無彼。穢土淨國。本來一心。生死涅槃。終無二際。然歸原大覺。積功乃得。隨流長夢。不可頓開。所以聖人垂迹。有遐有邇。所設言敎。或褒或貶。至如牟尼世尊。現此娑婆。誡五惡而勸善。彌陀如來。御彼安養。引三輩而導生。斯等權迹。不續藏經。(釋元曉, 이평래 번역, 〈無量壽經宗要〉 序文)

 

                                                                                                                         불기 2569년 2월 10일

                                       
불교일보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