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58년 '유행가'로 국민 달랜 송대관(종합)
가난·무명 딛고 노랫말처럼 '쨍하고' 성공…"내 신조는 인조이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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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가수 송대관 별세 (서울=연합뉴스) '해뜰날' 등으로 큰 인기를 누린 트로트 가수 송대관이 7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79세.

송대관은 1967년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해 1975년 '해뜰날'이 히트하며 인기 가수로 도약했다. 이후 '네박자', '유행가', '차표 한장' 등 많은 히트곡을 내며 태진아, 현철,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사대천왕으로 불렸다.

사진은 2010년 11월경 KBS 1TV '가요무대' 25주년 특집 리허설'에서 열창하는 송대관. 2025.2.7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기사발신지=연합뉴스) 이태수 최주성 기자 =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해뜰날')

7일 세상을 떠난 가수 송대관은 대표곡 '해뜰날' 가사처럼 가난과 무명 시절을 이겨내고 '쨍하고' 성공한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가수였다.

1946년 '판소리의 고장'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고인은 조부가 독립운동을 해 재산을 일본인들에게 빼앗기면서 어린 시절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전주방송에서 전속가수로 활동하고, 서울 노래경연대회에서 상을 타는 등 일찌감치 가수로 재능을 드러냈다. 그러나 1967년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한 이후 수년 간 무명 생활을 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1970년 '당신은 떠났어도'와 1971년 '세월이 약이겠지요'로 이름을 알렸고, 1975년 '해뜰날'이 크게 히트하면서 스타 반열에 올랐다.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는 "'해뜰날'은 마치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경제 개발 시대에 딱 맞는 주제가처럼 울려 퍼졌다"며 "이 노래 때문에 '쨍'이라는 단어가 크게 유행했다"고 말했다.

송대관은 '해뜰날'을 비롯한 숱한 히트곡으로 가수로 산 58년 동안 많은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노래를 들려줬고, '시대의 응원가'를 만들어냈다.

'해뜰날'이 히트한 데는 흥이 절로 나는 멜로디와 희망을 주는 가사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도 있다.

1975년 당시는 이른바 '대마초 파동'으로 정부가 '공연활동 정화대책'을 발표하며 심의를 강화하던 때였다. 이 때문에 그때까지 트로트와 함께 가요계를 양분하던 포크와 그룹사운드 팀들이 급격하게 위축됐다. 반대로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 등 복고풍 음악이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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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뜰날' 부른 트로트 가수 송대관 별세 (서울=연합뉴스) '해뜰날' 등으로 큰 인기를 누린 트로트 가수 송대관이 7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79세.

송대관은 1967년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해 1975년 '해뜰날'이 히트하며 인기 가수로 도약했다. 이후 '네박자', '유행가', '차표 한장' 등 많은 히트곡을 내며 태진아, 현철,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사대천왕으로 불렸다. 2025.2.7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송대관은 그러나 당대 가수들의 주요 수입원이던 극장 쇼가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또다시 생계가 어려워지자 1980년 처가가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곳에서 10년가량 슈퍼마켓 등 여러 사업을 하다가 고국이 그리워 1980년대 후반 귀국했다.

그는 1990년대부터 신나고 구수한 멜로디를 앞세워 '차표 한 장', '네 박자', '유행가' 등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고(故) 현철, 태진아,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불렸고, MBC '10대 최고가수왕',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옥관문화훈장 등 수십 개의 상을 받았다.

20여년간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2013년 아내의 부동산 투자 실패로 사기 사건에 휘말리며 방송가를 잠시 떠났다가 2015년 무죄 판결을 받는 등 우여곡절도 겪었다. 법정에서 혐의는 벗었지만, 그 과정에서 수백억원대 빚을 떠안게 됐다. 그는 이후 빚을 갚으려 월세살이를 하며 70대의 나이에도 하루 5개의 행사를 소화했다.

그는 수년 전 암 투병을 하고, 이런저런 질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도 비교적 최근까지 '가요무대' 등 TV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마이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2008년에는 제2대 대한가수협회장에 취임해 가수들의 권익 신장에 앞장섰다. 2009년 KBS 드라마 '공주가 돌아왔다'와 2011년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 SBS '신기생뎐'으로 연기에도 도전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2006년 광복절 보신각 타종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송대관은 과거 인터뷰에서 "내 신조가 '인조이 마이 라이프'(Enjoy My Life)다. 재방송 없는 인생인데, 열심히 살아도 늘 부족하다"며 "그러나 지금 부족한 것은 전혀 부끄럽지 않다. 작사·작곡가, 연주인, 제작자, 방송인 등 모두가 힘을 합쳐 나아가다 보면 보다 밝은 내일이 반드시 온다"고 긍정적인 인생관을 드러냈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송대관은 '해뜰날' 등으로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위로를 안겨 준 가수"라며 "1980년대 이후 현철, 설운도, 태진아와 '트로트 4대천왕'으로 불리며 트로트의 전성시대를 일궈냈다"고 평했다.

"네 박자 속에 /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울고 웃는 인생사 / 연극 같은 세상사 / 세상사 모두가 네박자 쿵짝∼."('네박자')

고인의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9일 오전 11시다.

ts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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