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점령지 '재산 강탈' 합법화…집 뺏기는 우크라인
소유주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주거용 건물 압류 허용

소유권 증명하려면 직접 방문…러 여권도 필수

X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점령지 마리우폴의 새 아파트 건물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기사발신지=연합뉴스) 송진원 특파원 =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 내 '재산 강탈'을 사실상 합법화하면서 수천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집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고 키이우인디펜던트가 23일(현지시간) 전했다.

러시아 국가두마(하원)는 최근 우크라이나인이 러시아 법률에 따라 재산을 등록하지 않은 경우 국가가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새 법안을 통과시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곧바로 서명한 이 법안은 점령 당국이 소유주가 없다고 간주되는 주거용 건물을 압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유효한 서류가 없는 우크라이나인의 재산도 몰수될 수 있다고도 명시하고 있다.

문제는 소유권 증명은 반드시 직접 방문해 이뤄져야 하며 서류는 러시아 여권과 함께 제출된 경우에만 인정된다는 점이다.

키이우인디펜던트는 이 법안이 러시아 정부가 불법 병합한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공고히 하고 남은 주민을 '러시아화'하려는 조치라고 평가했다.

점령연구센터의 페트로 안드류셴코 소장은 이법이 "점령 당국에 소유권 증서를 거부하기만 하면 누구의 재산이든 마음대로 압수할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이 과정을 공식적으로 합법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미 점령지에서 러시아인이 5천채의 아파트를 점유했으며 매주 100∼200채씩 러시아인 손에 넘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쟁 발발 후 피란한 우크라이나인들은 하루아침에 재산을 뺏기게 된 상황이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 당시 마리우폴에 살았던 안나 셰브첸코(30)는 "러시아인들이 내 아파트를 가져가는데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여권을 발급받아야 하는데 내 성향(친우크라이나) 때문에 입국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허가해도 성폭행당하고 살해당할까 두렵다"고 했다.

현재 안나의 아파트엔 그의 사촌이 살고 있으나 그 역시 공식 소유주로 등록되지 않은 만큼 새 법에 따라 언제든 강제 퇴거당할 수 있는 처지다.

마리우폴이 점령된 후 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집에서 대피시켰다는 야니나 안드리예예바(28)는 "그 집을 누군가 밟을 거라는 생각에 역겹고 기분이 더럽다. 그 집은 내가 태어나 처음 살았던 집"이라며 "그 집과 작별하는 건 내 선택이 아니었다. 그들은 집을 빼앗았고 집에 대한 나의 선택권도 빼앗아 갔다"고 비판했다.

X
마리우폴 시내 전경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법에 따르면 압류된 주택은 러시아가 임명한 공무원, 군인, 법 집행관, 교사 및 의사를 위한 관사로 배정되거나 특별 임대차 계약에 따라 러시아 시민에게 임대될 수 있다.

이 법은 점령지 내 우크라이나인의 이주 계획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러시아 점령지를 떠나는 이들을 지원하는 자원봉사 단체의 공동대표 율리아 보클라는 "점령지 내 상당수는 러시아인에게 집을 빼앗길 걸 알기에 떠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며 "이 법은 사람들의 대피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했다.

자포리자주 점령지에 사는 한 여성은 "새집을 지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이를 버리고 모든 걸 러시아인에게 넘길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보클라는 러시아가 이런 법을 이용해 점령지를 떠난 이들이 돌아와 러시아 여권을 취득하고 재산을 매각하도록 압박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점령지에서 떠나야 했던 많은 이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꾼다"며 "그런데 점령자들이 자기들 집을 빼앗아 러시아인이 그곳에 살게 될 것이라는 현실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는 단순히 우크라이나인들의 집을 빼앗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법적 차원에서 공식화하고 선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s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