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안(西安)의 종남산 흥교사(興敎寺)에 있는 '측사탑(測師塔, 원측의 탑묘)' 앞에서 경남 함양 마천초등학교 35회 성지순례단


Ⅰ. 서론

*신문편집 사정상 각주는 생략하였음을 밝힌다. _편집자 주

인간의 삶의 문제는 미묘하기 이를 데 없다. 사람 숫자만큼이나 많은 삶의 문양이 펼쳐진 세계의 광막함을 생각해 보면 그 막연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불교철학의 분야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올 만나볼 수 있지만 문아 원측(613〜696)만큼 대할 때마다 우리에게 희비가 교차되는 감을 자아내는 인물도 드물다.

원측은 신라 사람이다. 그는 당시 사상계의 일반적인 추세에 따라 당대 최고의 문화적 수준을 맛보기 위하여 당에 유학하였다. 그 뒤로 그는 더 이상 신라 땅을 밟을 수 없었다. 그의 학문적 수준은 당대 최고의 것이었다. 그가 남긴 불교철학적인 궤적은 그가 살던 당시에 이미 상당한 주목올 받았으며, 그후로는 그의 뒤를 이어 이른바 서명학파를 형성하게 되는 제자들에 의해 학맥이 이어지고 한편에서는 현장(602~664) - 규기(6322〜682)를 잇는 법상종에 의해 그의 학설에 대한 비판도 이루어지게 된다. 이런 사실은 원측의 주장에 남다른 면모가 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자에 들어 원측의 학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적지 않은 연구성과가 발표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원측의 저술 속에는 그의 박학함이 곳곳에 스며 있지만 유식학이 그 중심에 놓여 있음은 명백하다. 그렇지만 그의 학문세계는 종파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점이 종파적인 경향이 매우 강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무리없이 수용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아울러 그가 신라인이라고 하는 점도 당시에 중국에서 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형성하는 데 보이지 않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원측의 유식학의 핵심에 불교의 중도개념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그가 불교철학의 다양한 면모 가운데 어떤 일면만을 고집하지 않고 전체적인 이해의 폭올 가지고 불교의 본래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당시의 종파적인 불교에서 벗어나 불교 본래의 지향점과 의미를 찾고자 했음은 그의 저술 속에 인용되고 있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문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유식이라는 기본 입장올 통하여 원측은 불교의 중도개념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으며 그때 나타나는 그의 철학적 입지는 어떤 것일까? 본고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대적으로 사람마다 다양한 관점에서 계승 전개되고 있는 불교의중도사상이 원측에게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을 고찰하고자 한다.

원측의 저술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불설반야바라밀다심경찬(佛設般若波羅密多心經贊』과 『인왕경소(仁王經疏)』. 그리고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뿐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제자들의 저술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본고는 우선 현존하는 그의 저술을 중심으로 하면서 초기의 유식계 문헌을 참고로 그의 철학적 기반올 살펴보고자 한다. (석종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