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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성찰 자료 1: <無門關> 第二則 백장야호百丈野狐
本則:百丈和尙 凡參次 有一老人 常隨衆聽法 衆人退 老人亦退 忽一日不退 師遂問 面前立者復是何人 老人云 諾 某甲非人間也 於過去迦葉佛時曾住此山 因學人問 大修行底人還落因果也無 某甲對云 不落因果 五百生墮野狐身 今請和尙 代一轉語貴脫野狐 遂問 大修行底人還落因果也無 師云 不昧因果 老人於言下大悟 作禮云 某甲已脫野狐身 住在山後 敢告和尙乞依亡僧事例 師令維那白木追告衆 食後送亡僧 大衆言議 一衆皆安 涅槃堂又無人病 何故如是 食後只見師領衆至山後嵓下 以杖挑出 一死野狐 乃依火葬 師至晩上堂 擧前因緣 黃檗便問 古人錯祗對一轉語 墮五百生野狐身 轉轉不錯 合作箇甚麽 師云 近前來 與伊道 黃檗遂近前 與師一掌 師拍手笑云 將謂胡鬚赤 更有赤鬚胡.
無門曰, 不落因果爲甚墮野狐 不昧因果爲甚脫野狐 若向者裏著得一隻眼 便知得前百丈籯得風流五百生.
頌曰 不落不昧 兩采一賽 不昧不落 千錯萬錯.
요처(要處)
1)여우 노인은 어째서 ‘불락인과不落因果’라 대답해 여우가 되었으며 어째서 ‘불매인과不昧因果’라는 일전어一轉語에 여우 몸을 벗어났는가?
2) 만일 여우 노인이 백장 스님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물었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답했겠는가?
3) 제자 황벽에게 뺨을 맞자, 백장 스님이 박장대소하며 ‘달마의 수염은 붉다더니 과연 붉은 수염의 달마가 (여기) 있구나!’라고 한 참뜻은 무엇인가?
백장야호(百丈野狐) 해석
본칙: 백장百丈 스님이 설법할 때마다, 한 노인老人이 있어 늘 대중大衆들과 함께 앉아서 설법說法을 듣다가, 대중이 물러가면 함께 물러가곤 하더니, 어느 날은 물러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스승은 이상히 여겨 “여기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냐?”라고 물었다. 노인이 답하기를, “네, 저는 인간人間이 아닙니다. 먼 옛날 가섭불迦葉佛이 계실 때 이 절의 주지住職였습니다. 어느 날 한 승僧이 ‘많이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하고 묻기에, 제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느니라.’라고 답하였기 때문에 저는 오백생五百生 동안 들 여우가 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화상께서 어서 저를 위하여 부디 일전어一轉語로 여우의 몸을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하고는 노인이 백장 선사禪師에게 물었다. “많이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그러자 스승이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라고 답하자 그 말끝에 노인은 크게 깨닫고 절하며 말하기를, “저는 이제 여우의 몸을 벗어나 뒷산에 있으니 스님께 바라건대 부디 ‘죽은 스님’과 같이 장례를 치러 주십시오.” 그러자 백장 선사께서 유나維那로 하여금 대중에게 점심 식사 후 장례식葬禮式이 있다는 것을 알리게 했다. 대중이 수근 거리기를 “일중一衆이 모두 건강하고 열반당涅槃堂에도 병든 스님도 없는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하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식사 후 스승은 대중들을 이끌고 뒷산 바위 밑에 이르러 주장자로 죽은 여우를 끌어내서, 이것을 화장火葬했다. 저녁때 스승은 법석法席에 올라 지금까지의 경위를 대중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황벽黃檗이 묻기를, “고인古人이 그릇되게 대답하여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게 되었다는데 만일 그가 그때 그릇되게 대답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스승이 답하기를,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그대를 위해 가르쳐 주겠노라.” 황벽이 몇 발짝 앞으로 나아가 스승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겼다. 스승은 박수치며 웃어 가로되, “달마의 수염은 붉다더니 과연 붉은 수염의 달마가 (여기) 있구나!”
평창: 무문 선사 말하기를, “불락인과不落因果!라고 했을 때 왜 여우가 되었으며 불매인과不昧因果!라고 했는데 어째서 여우 몸을 벗어났을까?” 만약 이를 지혜의 눈으로 꿰뚫어볼 수 있다면 곧 전백장前百丈의 오백생五百生은 도리어 풍류적風流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송: 송하여 가로되,
불락不落이건 불매不昧이건
동전 앞뒷면 가운데 하나일 뿐!
불매不昧이건 불락不落이건
모두 그르쳤네.
백장야호百丈野狐 제창提唱
이 공안은 무문관뿐만 아니라 ‘종용록從容錄’과 ‘선문염송禪門才占頌’에도 들어있으며, 매우 투과하기 어려운 난투難透의 공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추측하건데 백장 선사는 어느 날 뒷산을 산책하다 바위 밑 굴속에 여우가 한 마리 죽은 것을 보고 제자를 하나라도 더 깨우쳐주기 위해 대중을 모아놓고 일장 연극을 한바탕 벌렸으리라 생각된다. 아무튼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수행자들을 ‘불락인과不落因果’와 ‘불매인과不昧因果’사이를 오락가락하게 하면서 철저히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멋진 공안을 만들어냈으니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리라.
문제의 발단은 오백생五百生 동안 여우 몸을 계속 받고 있어 이를 벗어던지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위해 발버둥 치며 괴로워하고 있는 여우 노인에게 있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여우와 사람이라는 이원적二元的 분별심分別心을 어떻게 놓아 버리는가에 달려 있다. 자! 여러분이 여우 노인이었다면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찬찬히 잘 참구해보시기 바란다.
한편 이런 상황은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 주변 도처에 깔려 있다. 사실 대부분의 중생들은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맡은 바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여우 짓을 하며 늘 괴로워하고 있다. 그 결과의 한 보기를 들면, 이번에는 특히 크게 겪었지만 매년 장마철이 되면 물난리가 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담당자들이 늘 늦장 대처해 항상 서민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등, 온 나라가 사고 투성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재가수행자의 경우, 각자 모두 현재 맡고 있는 전문직에 충실한 것이 선행先行되지 않으면 이 화두를 들고 수십 년 씨름한다 하더라도 이 화두를 결코 제대로 투과透過할 수 없다는 점을 일깨워드리고자 하는 바이다.
참고사항
회해懷海 선사(720-814)는 보통 백장百丈이라 불리고 있으나 이는 지명地名이다. 회해 선사는 홍주洪州 남창부南昌府의 백장산百丈山 대지원大知院에 머물면서 95세까지 산 당대唐代의 선승禪僧이다. 때는 바야흐로 당이 가장 성盛한 때인 동시에 선이 가장 왕성한 정기精氣에 꽉 차 있던 시대였다. 사회에 대한 선의 역할이 확립됨과 함께 선원禪院의 규율을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어 백장 선사가 처음으로 정식 선원규칙禪院規則을 제정한 것은 선원사상禪院史上 획기적인 일이다. 훗날 ‘백장청규百丈淸規’로 불리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그는 활동적인 대용선大用禪을 몸소 실천하여 늙어서도 운수雲水들과 함께 일에 종사從事했다.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격언을 남긴 일은 유명하다.
회해는 복주福州 장락長樂 사람이고 성은 ‘왕王’씨이다. 소년일 때 출가하여 처음에는 불교의 학문적 연구에 정진하였으나. 수년 후에 강서江西에서 마조馬祖 대사大師가 선을 가르치고 있다고 듣고서 이곳에서 참구하여, 마음이 움직여져 마조 선사에게 지도를 받게 되었다. 이 때 마조 밑에는 서당지장西堂智藏, 남전보원南泉普願이 있어 함께 수행에 정진하였으며 훗날 이들은 각각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어느 때, 백장이 스승 마조 선사와 함께 걷고 있으니까, 들오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마조가 “저것은 무엇이냐?”라고 물으니, 백장은 “들오리입니다.”라고 답했다. “어디로 날아가고 있느냐?”라고 마조가 묻자, “벌써 떠나가 버렸습니다.”라고 백장이 답하니까, 마조는 곧 손을 뻗어 백장의 코를 비틀어 올렸다. 백장이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르니까 마조는 “벌써 날아가 버렸다고 말할 수 있느냐?”라고 다그쳤다. 백장은 그 말에 숨은 뜻을 알아 차렸다고 한다.
수년 후 백장은 다시 마조에게 불리어 갔다. 마루에 걸려 있는 파리채에 대해서 묻고 답한 뒤 마조는 위엄 있게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이것에 의하여 백장은 마음 속 일체를 다 털어버리고 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상 두 이야기는 선종사상禪宗史上 유명한 이야기이다. 회해 선사 밑으로 모이는 자들이 점차로 늘어나 드디어 부탁을 받아들여 홍주洪州에 있는 대웅산大雄山 주지가 되었다. 이 산은 아주 험악한 산이므로 사람들은 이것을 백장산이라 불렀다. 많은 수행자가 모여들었으며 그 중 위산영우潙山靈祐와 황벽희운黃檗希運은 백장 문하의 수제자이다. 서기 814년 1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95세였다.
이 공안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선사 황벽희운 선사는 복주福州 현( 현) 사람, 생년은 나와 있지 않다. 소년시절 복주 복청현福淸縣의 황벽산黃檗山 건복사建福寺에서 출가했다. (황벽이라는 것은 일종의 염료를 따는 식물로 건복사 주변에 번성해 있었다.) 그 후, 재상인 배휴裴休(797-870)가 희운 선사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위해 홍주에 선원을 세웠다. 희운은 고향을 그리워하여 그 절을 황벽산이라 이름 붙였으며 결국에는 그 자신이 황벽이라 불리게 되었다. ‘전심법요傳心法要’라는 저서를 남겨 놓아 이것을 통해 그의 선풍禪風을 잘 엿볼 수 있다.
황벽은 처음에 각지를 돌아다녀 불교의 학문적인 연구를 계속했지만, 백장 선사의 명성을 듣고, 그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어느 때. 친구인 남전을 방문하고는 물러나려 할 때, 문까지 전송 나온 남전이 황벽의 갓을 들어 올리면서 “당신은 덩치는 큰 데, 갓은 작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황벽은 “그러나 이 속에 전 우주가 그대로 들어 있어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나도 그 안에 있군요.”라고 남전이 말하자, 황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총히 걸어 나갔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당당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또 어떤 때, 백장이 황벽에게 물었다. “어디에 다녀왔느냐?” “대웅산 기슭에 버섯을 따러 갔었습니다.”라고 황벽이 답했다. 그러자 백장이 “그럼 거기서 호랑이를 만나지 않았는가?”라고 말하자마자 황벽은 스스로 호랑이가 되어 “어흥! 어흥!”하며 표호 하였다. 이때 백장이 도끼를 휘두르며 찍으려 하자 황벽은 스승의 팔을 붙잡으며 일격을 가하고는 큰 소리로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 후 상당上堂 하여 설법을 할 때 백장은 제자들에게 “산기슭에 호랑이 한 마리가 있으니 너희들도 조심하며 살펴 다녀라. 나도 오늘 물리고 말았다.”라고 말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상 얘기한 바와 같이 황벽 선사의 선은 매우 날카로운 기봉機鋒을 가진 격렬한 것이었다. 그는 준엄하고 투철한 선풍, 인격을 가지고 당시 선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서기 850년에 열반했다. 당唐 무종武宗 황제의 불교탄압이 있은 지 5년 후의 일이었다.
2) 자기성찰 자료 2: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성공했다"
노후 행복의 열쇠는 인간관계였다
하버드 대생 268명 72년간 인생 추적…
3분의 1은 정신질환
"엘리트라는 껍데기 아래서 고통 받아"
'그는 하버드대의 수재였다. 아버지는 부유한 의사, 어머니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었고, 판단력이 뛰어났다. 이상도 높았고 건강했다. 그러나 31세에 부모와 세상에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돌연 잠적하더니 마약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망했다. '전쟁 영웅이었고 평화 운동가였다'는 부음기사가 나갔다.' (141번 사례)
'활발하던 한 학생은 결혼 후 세 아이를 낳고 이혼했다. 동성애 인권운동가가 됐다. 삶에 더 남은 것이 없다며 술에 빠져 살다가 64세에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47번 사례)
1937년 미국 하버드대 남학생 268명이 인생사례 연구를 위해 선발됐다. 세계 최고의 대학에 입학한 수재 중에서도 가장 똑똑하고 야심만만하고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이들이었다. 후에 제35대 미국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Kennedy),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으로서 닉슨의 워터게이트사건 보도를 총괄 지휘했던 벤 브래들리(Bradley, 현재 부사장)도 끼어 있었다.
당시 2학년생으로 전도유망했던 하버드 생들의 일생을 72년에 걸쳐 추적한 결과가 12일 시사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 6월호에 공개됐다. 1967년부터 이 연구를 주도해온 하버드 의대 정신과의 조지 베일런트(Vaillant) 교수는"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결론지었다.
연구결과 47세 무렵까지 형성돼 있는 인간관계가 이후 생애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안정적인 성공을 이뤘다. 연구 대상자의 약 3분의 1은 정신질환도 한때 겪었다. "하버드 엘리트라는 껍데기 아래엔 고통 받는 심장이 있었다."고 잡지는 표현했다. 행복하게 늙어가는 데 필요한 요소는 7가지로 추려졌다. 고통에 적응하는 '성숙한 자세'가 첫째였고, 교육·안정적 결혼·금연·금주·운동·적당한 체중이 필요했다.
베일런트 교수는"어떠한 데이터로도 밝혀낼 수 없는 극적인 주파수를 발산하는 것이 삶"이라며"과학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숫자로 말하기엔 너무나 아름답고, 학술지에만 실리기에는 영원하다."고 말했다.
◆ 금연·운동 등 7대 요소 가운데 5가지 이상 갖춘 106명은 80세에도 절반이 행복
특정 개인의 역사를 장기적으로 추적한 '종적(縱的) 연구'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하버드대 2학년생 268명 생애 연구'는 1937년 당시 하버드 의대 교수 알리 복(Bock)이 시동을 걸었다. 연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한 백화점 재벌 W T 그랜트(Grant)의 이름을 따 '그랜트 연구'라고도 불린다.
연구는"잘 사는 삶에 일정한 공식이 있을까?"라는 기본적인 의문에서 출발했다. 연구진에는 하버드대 생리학·약학·인류학·심리학 분야의 최고 두뇌들이 동원됐다. 이들은 정기적인 인터뷰와 설문을 통해 대상자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체크했다.
268명 대상자 중 절반 정도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남은 이들도 80대, 90대에 이르렀다. 지난 42년 간 이 연구를 진행해온 조지 베일런트(Vaillant) 교수는 대상자들의 행적이 담긴 파일을 소개하며"기쁨과 비탄은 섬세하게 직조(織造)돼 있다."는 윌리엄 블레이크(Blake·1757~1827)의 시구를 인용했다.
최고 엘리트답게 그들의 출발은 상쾌했다.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한 사람이 4명이었고 대통령도 나왔다. 유명한 소설가도 있었다. 그러나 연구 시작 후 10년이 지난 1948년 즈음부터 20명이 심각한 정신 질환을 호소했다. 50세 무렵엔 약 3분의 1이 한때 정신질환을 앓았다.
행복하게 나이가 들어가는데 필요한 '행복 요소' 7가지 중, 50세에 5~6개를 갖춘 106명 중 절반이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고 있었다. '불행하고 아픈' 이들은 7.5%에 그쳤다. 반면 50세에 3개 이하를 갖춘 이들 중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개 이하의 요소를 갖춘 사람은 그 이상을 갖춘 사람보다 80세 이전에 사망할 확률이 3배 높았다.
50세 때 콜레스테롤 수치는 장수(長壽)와 무관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콜레스테롤 수치가 중요한 시기가 있고 무시해야 할 시기가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어릴 적 성격도 장기적으로는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수줍음을 타던 어린이가 청년기에는 고전하더라도 70세에는 외향적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았다. 대학교 때의 꾸준한 운동은 그 후 삶의 신체적 건강보다는 정신적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성공적인 노후로 이끄는 열쇠는 지성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적성, 즉 인간관계였다.형제·자매 관계도 중요하다.65세에 잘 살고 있는 사람의 93%가 이전에 형제·자매와 원만하게 지낸 사람들이었다.
인간의 기억이 나이가 들어가며 왜곡되는 모습도 보여줬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들 중 34%가 1946년에 "적군의 포탄 아래 놓여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25%는 "적군을 죽여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42년 후인 1988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포탄 아래 놓여봤다."는 답변자는 40%로 늘었고, "죽여 봤다."는 답변은 14%로 줄었다.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모험성은 첨가되고 치명적 위험성은 약화되는 쪽으로 왜곡된다."는 것이 베일런트 박사의 진단이다.
한편,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Brooks)는 "이번 연구는 대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상상력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소설 같은 삶이 현실에도 존재함을 보여준다."며,"과학의 잣대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삶은 미묘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평했다.
3) 자기성찰 자료 3:
나비와 꽃
양관(良寬, 1758-1831)
화무심초접花無心招蝶
꽃은 무심코 나비를 부르고
접무심심화蝶無心尋花
나비는 무심코 꽃을 찾으니,
화개시접래花開時蝶來
꽃이 필 때 나비가 오고
접래시화개蝶來時花開
나비가 올 때 꽃이 피네.
오역부지인吾亦不知人
나 역시 그를 모르고
인역부지오人亦不知吾
그 역시 나를 모르는데,
부지종제칙不知從帝則
서로 모르면서도 제각각 자연의 법칙을 따르며
비자타묘력非自他妙力
자타불리自他不二의 오묘奧妙한 신통력이 조화를 부리고 있네.
3) 자기성찰 자료 3:
진정한 참회懺悔
옛날, 일본에 양관(良寬)이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은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되었으므로 동생이 집안의 대를 잇게 되었습니다. 동생에게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이게 되었는데, 이 양자가 이만저만 속을 썩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힐 뿐 아니라, 싸움꾼에 노름까지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양자 때문에 속을 썩이다 썩이다가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양자를 패기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문중회의를 열기 위해 집안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며 당연히 그 자리에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자 큰아버지인 양관 노스님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회의가 열리자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양자의 잘못된 점을 조목조목 늘어놓으며, 양자를 패기 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양관 노스님께 결론을 내려줄 것을 청했습니다.
"이 집안의 가장 웃어른은 스님이시니 스님께서 마지막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처음부터 한 마디 말씀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계셨던 양관스님께서는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습니다.
"벌써 날이 저물었구나. 이제 그만 절로 돌아가야겠다."
그 말만을 하고 방을 나온 양관스님이 짚신을 신기 위해 마루 끝에 걸터앉자, 그 문제꾸러기 양자가 달려와 짚신을 신겨주고 짚신 끈을 묶어 주었습니다. 자신을 내몰지 않은 큰아버지 양관 노스님에 대한 뭉클한 정감을 느껴 은연중에 짚신을 신겨 드린 것입니다.
그때 짚신 끈을 묶고 있는 양자의 손등에 몇 점의 물방울이 떨어지자 양자는 고개를 들어 스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 물방울은 노스님의 주름진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었습니다.
노스님의 눈물.......
그날 이후 양자의 성격과 행동은 백팔십도로 달라져 너무나 착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法境 합장
[사진] 불광미디어. 붓다빅퀘스천 35회. [박영재의 양자역학과 불교] 캡쳐
■법경(法境) 박영재 법사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6년 반 동안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 1989년 9월부터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서강대 물리학과장, 교무처장, 자연과학부 학장을 역임했다.
1975년 10월 사단법인 선도성찰나눔실천회 종달(宗達) 이희익(李喜益) 노사 문하로 입문 1987년 9월 노사의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로부터 두차례 입실 점검을 받았다. 1990년 6월 종달 노사 입적 후 지금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