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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원측의 유식설과 연기(緣起)구조

유식(vijñānamātra)이라는 용어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처럼 유식의 특징은 '식識(vijñāna)을 표방하는 것이다. 반야가 공으로 집약되는 것처럼 유식학은 ‘오직 식’이라는 말에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불교의 핵심이 ‘연기(緣起)’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점에 주목하여 유식의 ‘식’이 담고 있는 연기의 맥락을 살펴보고 원측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풀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고찰함으로써 그의 유식철학의 기본적인 골격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논자는 불교 이해법의 일반화를 도모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자면 원측의 유식학은 불교 이해의 몇 가지 기본적인 골격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 것이고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의 저술 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1. 식(識)

구체적으로 아리야(阿賴邪, ālaya)라고 하는 용어가 적용될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유식의 식은 아리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이다. 이것은 제8 아뢰사식 이외의 식을 전식(轉識)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면 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유식학이 철학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까닭도 바로 '식’이라고 하는 용어 때문이다. 즉 서양철학의 인식론과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불교의 유식학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러한 입장에서 불교 유식학에 관심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식'은 근본불교의 12연기에도 나타나는데 우선 그때의 ‘식’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정형화된 12연기를 간략하게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무명(無明)−행(行)−식−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 −수(受)−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이것을 보면 12연기의 순서가 행 다음에 식-명색-육처로 이어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식’은 우리의 인식이고, 명색은 인식대상이고, 육처는 인식기관이라고 할 때. 인식대상과 감각기관에 선행하여 '식’이라고 하는 우리의 인식이 먼저 거론되고 있다는 것을 눈여겨 둘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인식과정은 인식대상인 명색과 인식기관인 육처에 이어 인식작용이라 할 수 있는 식의 활동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만 정형화된 12연기의 차례는 명색이나 육처보다 '식’이 먼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인식과정에 따라 명색 다음에 '식’과 육처의 성립을 설히는 경우도 있지만, 12연기는 무명−행−식−명색−육처−촉으로이어지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것은 12연기의 ‘식’ 속에 이미 자아의식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현실적인 확대과정 속에서 명색과 육처가 대립적인 구도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여기에 일반적인 인식과정을 설정하고 있는 경우까지 고려한다면 그것은 촉이라고 하는 상황 속에서 주객이 동시적으로 상호관계함으로써 드러나는 인식작용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작용은 인식기관과 인식대상이라고 하는 주객 대립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식작용은 전체적으로 분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즉 ‘식’이라고 하는 말이 가지고 있는 디층적인 의미기 때문에 유식학의 전체적인 이해가 막연해 지고 그것의 핵심적인 의미 파악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유식의 ‘식’은 어째서 아뢰사식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는 점이 매우 난해하다. 이 문제는 이른바 근본불교의 18계(界)를 되새겨 봄으로써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8계는 6근(根)과 6경(境) 그리고 6식(識)을 가리킨다, 6근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신(身), 의(意)이고 6경은 색(色). 성(聲). 향(香)、미(味). 촉(觸). 법(法)이며 6식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신식(身識). 의식(意識)이다. 여기서 문제는 육근 가운데의 의와 6식 속의 의식이다. 하나는 인식기관으로서의 의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작용으로서의 의식이라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의와 의식 가운데 의식은 비교적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의식의 근거인 의는 미묘한 것이다.

이 문제를 유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식에는 모두 육종(六種)의 차별이 있다. 육근과 육경에 따라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안식 내지 의식 등은 육근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오의(五義)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오의란 심식(心識)은 근에 의지하고. 근에 의지하여 발생하고, 근에 속하고. 근을 돕고, 근과 하나같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육식신(六識身)이 모두 의에 의지하여 전생(轉生)하지만 불공(不共)의 뜻에 따라 의식이라고 하는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식신이 서로 혼동됨이 없는 것과 같다.

아뢰야식이 있으므로 말라(末那)가 있고. 이 말나를 의지하여 의식이 전생한다.

유식에서는육근 가운데 의근이 저17말라(manas)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말나식의 성격은 어떠한가?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에 다음과같은 말이 있다.

의는 아뢰야식의 종자로부터 생겨나 다시 그 (아뢰야)식을 연하는 것으로 아애(我愛), 아(我). 아소집(我所執). 아상(我恨)과 상옹한다.

저17말나식은 자아의식의 근원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성유식론(成唯識論)』에 의하면 ‘육식신이 모두 의에 의지하여 전생하지만’이라고 하므로 18계 전체는 말나식에 의지하여 성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18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자아의식 때문이다. 자아의식, 즉 제7 말나식이 없다면 18계 전체의 성립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