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대통령 내외분(청와대 뜰에서)" 사진: 박목월, 『육영수여사』

□소설 모란동백[1]

프롤로그

1

그해 2월.

유난히도 맹위를 떨쳤던 겨울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간밤에 연탄불이 꺼져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곽남호는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저녁 가까운 시각에 뻑적지근한 몸을 일으키며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난생 처음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고 거울 앞에서 옷 매무새를 만지작거렸으나 왠지 자기가 아닌 타인의 모습이요 이방인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긴 신사복 한 벌이 있을 리 만무한 그는 약품회사에 세일즈맨으로 다니는 주인집 둘째 아들에게 빌려 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남의 옷이라고 해도 체구라도 비슷했다면 또 모를 일이겠으나 주인집 둘째 아들에 비해 너무나 왜소한 그에게는 영락없는 허수아비 몰골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거울 속의 타인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던 곽남호는 선 채로 제자리에서 돌아섰다.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두 번 큰절을 올리고 앞으로 두 손을 모으며 가만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6·25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평생 자식 하나 뒷바라지하기 위해 행상을 했던 어머니였다. 그러나 당신의 꿈이요 희망이었던 아들의 대학 졸업을 다섯 달 앞둔, 그러니까 석 달 전인 지난해 12월에 유명을 달리하신 어머니였다. 영정 속 어머니를 파르르 떨리는 시선으로 주시하던 곽남호는 쩌잉하니 울리는 콧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돌아섰다.

구두를 신고 대문 앞을 나섰다. 마포 공덕동. 사방을 둘러보아도 개미집같이 손바닥 크기만한 집들만 닥지닥지 즐비한 소위 '달동네'였다.

“학생, 청와대 간다며?"

장바구니를 든 집 안주인이 좁은 골목길을 돌아와 대문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네. 할머니. 시장에 다녀오시나 보죠."

곽남호는 살짝 길을 비켜 주며 대답했다.

"장하구먼. 청와대는 대통령이 사는 디 아니더라고이. 국모님도 뵙게 될 것이고! 대학을 우등으로 나오게 됐는디 참말로 장해여. 학생 엄니가 여지껏 살 목심만 붙어 있어도 얼매나 좋것능가. 이만하게 자석도 키워 놓았다. 쯧쯧, 복도, 복도 지지리도 없제잉."

전라도 목포가 고향이라는 조금 비대한 몸집의 주인집 안주인은 몇번씩이나 돌아보며 혀끝을 찼다.

“네. 할머니.”

“장하제. 어여 다녀오소."

“네. 그럼.”

남호는 허리를 슬몃 구부리며 대문께를 벗어났다. 스산한 바람결이 콧등에 스쳤다. 어머니−. 가슴 밑바닥까지 숨을 들이마셨다가 훅 하고 토하면서 '어머니'를 되뇌었다. 정녕 '복도, 복도 지지리도 없는' 성싶었다. 가시고기가 그랬다고 하던가. 아니, 우렁이만 해도 그렇다. 자신의 뱃속에서 새끼 우렁이를 낳고, 그 새끼 우렁이가 어미의 살을 갉아먹으며 세상에 나올 때 어미 우렁이는 껍질만 남게 된다. 어디 가시고기나 우렁이뿐이겠는가. 숫사마귀는 암사마귀와 교미 후에 스스로 암사귀에게 잡혀 먹힌다. 아직 잉태하지도 않은 새끼 사마귀의 영양보충을 위해. 또, 살모사는 어떻고, 글자 그대로 에미 살모사는 새끼 살모사의 먹이가 되어 준다. 한낱 미물도 그러할진대, 어디 인간을 그와 같은 미물에 비할까. 어머니 당신은 평생의 몸과 마음을 나에게 주고 가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 당신은 빈 껍질만 남으셨습니다. 음울한 어조를 먼 허공에 날려보내며 곽남호는 뚜벅뚜벅 큰길로 나왔다.

마침 약속 장소에는 스쿨 버스가 먼저 와 시동을 걸어 놓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곽남호는 허겁지겁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맨 앞좌석에 앉아 있는 최문환 총장을 향해 넙죽 절을 하고 G대학 학장 옆좌석으로 갔다.

"좀 서둘지 않구."

"네."

다. 곽남호는 L학장 옆좌석에 주저앉으며 소매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제 다온 것 같소. 어서 갑시다."

최총장의 지시를 받은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버스는 서대문 로터리에서 독립문 방향으로 돌아 사직터널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석사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