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시성 시안시, 당나라 장안의 중심이자 천 년 고도의 향기가 서려 있는 도시 한가운데 자리한 대자은사(大慈恩寺). 당대 불교문화의 정수이자, 문명 교류의 산 증거인 이 사찰은 단순한 종교시설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기자는 최근 이 유서 깊은 사찰을 직접 순례하며, 역사 속 대자은사와 현재의 모습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다.


문덕황후를 기리며 창건된 왕실 사찰

대자은사의 시작은 7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고종 이치(李治)는 정관 22년(648년), 어머니 문덕황후 장손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폐허가 된 무루사(無漏寺) 자리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 절 이름인 '자은(慈恩)' 또한 '자애로우신 어머니의 은혜'를 뜻하며, 사찰의 태생부터 효(孝)의 정신을 담고 있다.


창건 초기부터 대자은사는 단순한 추모 공간을 넘어 당대 불교학과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전국에서 뛰어난 승려와 학자들이 모여들며, 사찰은 자원(子院) 10개를 포함해 전각만 1,897칸, 상주 승려 수 300명 이상에 달하는 대사찰로 자리매김하였다.


현장법사의 귀환과 대안탑의 탄생

대자은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대안탑(大雁塔)은 652년, 인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삼장법사 현장(玄奘)이 불경과 불상 등을 보관하고자 당고종에게 요청하여 세운 것이다. 초기에는 5층이었으나 측천무후 재위기에 10층으로 증축되었고, 이후 지진 피해로 명나라 때 7층으로 재건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탑은 단순한 유물 보존 공간을 넘어, 당대 불교의 국제성과 학술 교류를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현장은 사찰 내 번경원(飜經院)에서 제자인 규기(窺基), 신라의 원측(圓測) 등과 함께 방대한 한역 작업을 수행하였으며, 11년간 40여 부의 경전을 한문으로 옮기는 위업을 남겼다. 이 작업을 통해 대자은사는 법상종(法相宗)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였다.

사찰 그 이상의 문화공간

대자은사는 단순한 불교 수행처를 넘어 장안 시민의 문화·여가 공간으로도 사랑받았다. 봄이면 살구꽃, 여름엔 연꽃, 가을엔 단풍이 사찰 경내를 수놓았으며, 특히 모란정(牡丹亭)은 지금도 70여 종의 모란이 피어나는 장안의 대표 명소로 남아 있다.

불교 탄압이 극심했던 회창의 폐불(845년) 시기에도 대자은사는 폐사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명나라 가정 연간(1550년경)에는 대규모 중건을 통해 지금의 가람 배치가 정비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와 복원을 거치며 현재는 유적공원과 기념관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오늘날의 대자은사, 불교문화의 살아있는 박물관

현재의 대자은사는 단순한 종교공간을 넘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대웅보전, 범종루, 번경당, 현장삼장원 등 전통 건축물들이 엄정하게 정비되어 있으며, 대안탑 내부는 일반에 공개되어 있어 7층에 오르면 시안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 사찰은 당나라 장안의 황궁이던 대명궁에서 남쪽으로 약 7km 거리에 위치하며, 한때 장안의 종교와 문화의 랜드마크로서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일본 도지(東寺) 오층탑과 견줄만한 위상을 지녔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참배객과 관광객이 찾는 이유다.


동아시아 불교의 고리, 대자은사의 의미

대자은사는 당대 중국 불교의 정점이었을 뿐 아니라, 신라·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와의 교류가 이루어진 중심지였다. 원측의 활동은 신라 불교의 심화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며, 규기를 통해 발전된 법상종은 이후 동아시아 전역에 전파되었다.

오늘날의 대자은사는 종교 유산을 넘어, 인류 문명의 교류와 전파의 장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시안이라는 도시가 단순한 옛 장안의 그림자를 넘어 세계 문화유산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천 년을 넘는 시간을 건너 온 이 고찰은 오늘도 장안의 정신과 불교문화의 깊이를 조용히 간직한 채, 수많은 이들의 걸음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