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미륵불


□한국 고승열전 소설 1

한국 미륵신앙의 중흥조 진표율사

천 년의 약속

1. 화두

1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한류 현상이 크게는 지구화(globalization), 문화의 혼성화(cultural hybridity), 현지화(glocalization), 문화생산과 수용의 권역화(regionalization), 문화적 근접성(cultural proximity) 그리고 문화수용의 능동성(active reception)이라는, 이 다섯 가지의 서로 관련 혹은 대립하는 힘들의 중층적 영향/결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한 연구자의 지적에 일단 동의하고자 합니다. 한국 대중문화가, K-Pop이, 현재의 한류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는 주장도 없지 않지만, 우리는 일단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한류 문화의 저변에 대한 확충을, 다각도로, 점검해보자는 것이지요. 한류의 미래! 한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리고 나의 과제가 되겠지요. ⋯자.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여섯 명의 학생들이 연구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텅 빈 강의실에서, 나는, 주머니를 뒤져,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물고 창가로 갔다. 몸은, 느긋하지만, 머리 속이, 복잡했다. 아니, 혼란스러웠다. 두 번째 강의였다. 아직도 강단이 낯설었다. 과연 이 직업이 나에게 어울리는 옷일까. 담배 연기를 온몸 깊숙이 삼켰다가 창문을 향해 훅 뿜어냈다. 담배 연기는 안개처럼 사방으로 번졌다.

나는 꿈을 꾼다. 내 기억이 처음 열린 그때부터 지금까지 꿈을 꾸며 살았다. 살고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누구나, 꿈을 꾸며 산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도. 인간은 누구나 꿈을 꾸며 살고 있다. 과연 꿈꾸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뭐,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살아온 그때까지, 참, 혹독한 꿈을 꾸며, 꿈속에서 살아왔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을 당위로 알았다. 꿈꾸지 않는 자는 죽음이다. 주검이다. 과연, 그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선생님은 빨갱이 소설 쓰잖아요. 이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소설은, 안 됩니다.”

평소 잘 알고 있었던 출판사 사장의 그 말 한마디는, 나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 바뀐 세상! 내가 꿈꾸었던 완전한 그런 세상은 아니었지만, 당장에는, 차선책은 된다고 생각하였고, 나는 그 세상을 위해 참 무던하게도 모진 꿈을 꾸며 살아왔는데, 그 결과라는 것이 이건가, 한 편으로는,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아니, 꿈만이 아니었다. 작가로서, 기자로서, 나는, 현실을 피하지 않았고, 덕택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하였던가. 벌건 대낫의 대로상에서, 그것도 다섯 살난 아들이 보는 앞에서 너댓 명의 괴한들에게 불법납치당해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서초동 검찰청 어느 검사 앞에서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 채 조사받기도 했으며, 재판정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불려가, 같은 사내가 봐도 참, 잘 생긴 판사 앞에서, 죄라는 느끼지도 않으면서, 나도 모르게, 쥐어짜듯, 가슴 조여 보기도 했고, 그리고, 또, 감옥에 끌려가 몇 년을 썩고, 삭여야 했던가. 뜻밖에도 돈이 좀 모였을 때는 좀, 생뚱맞게도, 신문사를 차려 온통 그 꿈꾸는 곳에 ‘투자’했다가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하였다. 뭐, 대가를 바라고 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꿈꾸고, 싸웠던 그런 세상에서 비난받을 이유까지는 없지 않은가. 비난이다. 빨갱이 소설이라니! 빨갱이라니!

며칠 뒤, 나는 꿈 하나를 접었다. 절필이다. 참, 부질없이, 많은 글을 남발해 왔다. 변명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름의, 투쟁을 위한 무기였다.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니! 동기부터가 불순했던 것 같기도 하였다. 그것을, 나는 성스러운 것이라고 포장해 왔다. 나는 물론 내 가족을 먹고 살게 하는 글이니, 얼마나, 성스러운가. 또 있다. 내 소설은 민주주의를 위한 무기다! 오. 나는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다. 틀렸다. 틀려도 참, 많이 틀렸다. 내, 오만을, 나는 그렇게 포장했던 거다. 죄송하게도 그분, 붓다의 말씀을 빌린다면, 나는 한 마디의 글도 쓰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그동안 내가 쓴 글을, 하나도, 쓰여서는 안 되는 글이었다. ‘빨갱이 소설’이라는 비난을 들어서가 아니다. 그, 소리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게시같은 것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달여 동안 아파트 방구석에 틀어박혀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병이 찾아왔다. 참, 무지막지한 병이었다. 며칠 동안을 끙끙거리며 신열을 앓았다. 죽을 고비라는 생각이 몇 번씩이나 들었다. 무식하게도, 버텼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속셈이었다. 고개 하나를 넘으면 큰 병원이 있었다. 원자력병원이다. 암 전문 병원이지만, 뒷날 아내에게 들었던 소리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긴 기껏해야 1km 남짓 떨어진 병원을 119구급차에 실려 갔을 정도였다니까.

병원에 실려 온 그날부터 나는 또 하나의 경계와 싸워야 했다. 아니, 경계 앞에, 문턱 앞에서, 혼자 괴로워하며 몸부림쳐야 했다.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게 된 나는 2인실에, 강제, 입원을 당했다. 입원 첫날부터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7월의 여름 날씨는 지상의 모든 것이 불타는 듯한 무더위였다. 병실에는 에어컨조차 틀 수 없었다. 같은 병실에 입원한 환자가 찬 기운을 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암 환자였다. 강원도 강릉에서 왔는데, 30년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달 앞두고 암으로 판정받은 환자였다. 그것도, 췌장암이라고 하였다.

그는 1주일 만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퇴실했다. 바로 내 옆에서. 나는, 그 환자가, 죽어가는 것을, 똑똑하게, 보았다. 볼 수밖에 없었다. 그 환자가 누웠던, 침대는, 하루를 다 채우지도 않고 주인이 바뀌었다. 다음에 들어온 환자도 암 환자였다. 그렇게 한 달여를 입원하는 동안,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암 환자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랬는데, 회진 나온 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정밀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것을 알겠지만, 암일 수도 있습니다.”

흰 가운은, 안개같이 뿌연, 흰 가운을 입은 의자는, 나름 나를 생각해 준다는 양, 미소를 지을 듯 말 듯 하현달처럼 아니 하회탈의 그 가느다란 실눈을 하고, 매우 인자한 눈빛으로, 귀뜸하듯, 말해 주었다. 뒤에, 좀 여유를 갖고 생각해 보면 그 의사는 아주 틀린 얘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암일 수도 있다고 했지, 암이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는 소리를 좀 과하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와 아내의 귀에는 왜 암이라는 진단으로 알아들었을까. 지레 겁을 먹은 탓인지 몰랐다. 원자력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여 동안 나는 적지 않은 암 환자의 최후를 목격하였다. 오늘 밤에 살아서 우리와 얘기를 나누었던 환자가 다음 날 아침에는 주검이 되어 사라졌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따라서 회진 의사의 그 말 한마디는 우리에게 일종의 사형선고와 같은 울림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간호하던 아내는 벌써 훌쩍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냥, 진공상태에서 한동안 멍하니 어두컴컴한 병실 천정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1주일 뒤에 나온 결과는, 엉뚱하게도, 늑막결핵이라는 판정이었다.

다시, 두 달여 동안 원자력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는 동안, 나는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서울을 떠나는 꿈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에 온 이후 20년이라는 세월을 서울에서 살았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참, 오래,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절필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앞으로 소설을 쓰지 않겠다. 내 결심을, 각오를 들은 아내의 얼굴에는 벌써 걱정의 빛이 완연하다.

그때 나는 아내에게 한 마디 말을 툭 내뱉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 되겠지.”

아내는 반응이 없었다. 늘 그랬으니까. 아내의 바로 그런 점이 나를 옭아매는 무기가 되었다. 차라리, 아니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앙칼지게 부정이라도 한다면, 나는 더욱 강하게 튀어 나갔을 터다. 그러나 아내는 어떤 일이 닥치면 천 근 바윗덩어리같이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침묵 앞에 무릎을 꿇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모든 것을 털고 나니까 홀가분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는데, 승리의 여신이 아내의 머리 위에서 흰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때 나에게 손을 내민 것은, 대전 근교 계룡산 천왕봉이 한눈에 올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한류문화대학원대학교(이하 ‘한류대’로 줄임)라는 긴 이름을 가진 대학원대학교 교수 자리였다. 앓고 있는 병이 완치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나는 복부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차를 직접 몰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2

늦여름의 해는 정오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더위는 마지막 작열하는 기세로 한여름 무더위보다 더욱 날카롭게 내리쬐었다. 금산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주위에는 퍽 낯익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보제루를 나온 나는 정면에 보이는 대적광전과 오른쪽 미륵전 건물을 향해 합장을 올린 뒤에 곧장 설법전 건물 앞을 지나갔다. 다른 사람이 나를 눈여겨보았다면 퍽 익숙한 몸놀림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 터다.

“혹시, 원명스님, 아직도, 계십니까?”

적묵당 앞으로 다가선 나는 굳게 문이 닫혀 있는 건물 쪽을 흘끔거리면서 맞은 편에서 빗자루를 옆구리에낀 채 쪼글트리고 앉아서 잡초를 뽑고 있는 홍안의 한 노승에게 짐짓 떨리는 음색으로 말을 걸었다. 적묵당은 주지를 비롯한 삼직 스님의 거주처이자 후원 요사의 중심 건물이다. 일반 요사와는 달리 공양하고 예법을 갖추는 대중방(큰방)이 있는 수행 전용 건물이다. 그리고 맞은편에 ‘참석 수행중’이라는 검소한 팻말 하나가 결려있는 안쪽 건물은 화림선원이다. 일반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스님들의 선방이다.

“누구?”

노승이 물었다.

“원명스님이라고.”

“그놈을 왜 찾누.” 노승은 금방이라도 빗자루를 들고 후려 갈기려는 듯 퀭한 눈으로 나를 노려 보았다.

“그게, 저.”

“죽었어!.”

“아니, ⋯.”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승은 뒷짐을 진 채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망연한 눈빛으로 비틀거리 듯 흐느적거리며 사라지는 노승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나는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원명스님은 내 도반이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내가 한 때는 출가인이었다는 얘기부터 하는 것이 순서겠지. 그것도 바로 이곳 금산사에서 행자 시절을 보냈고 사미계를 받았다. 원명은 나보다 1년 늦게 머리를 깎았다. 그렇다고 해도 같은 나이인 우리는 도반이자 친형제와 같았다. 속가의 표현대로라면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꿈 탓이다. 정확하게는, 소설가 탓이었다. 내가 원명과 헤어지게 된 것은.

“이눔아. 소설가라니. 중이 소설가가 되겠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은사 스님은 단호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소설가와 스님은 좀 거리가 있었다. 차라리 시인이면 또 모를까. 전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문학 동아리에 가입했다. 촛불의 시인으로, 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로 널리 알려진 신석정 시인이 지도교사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시인이 꿈이었다. 그 꿈이 지금까지 유지되었다면, 나는 은사 스님의 바람을 굳이 저버리지는 않아도 좋았을 텐데. 나는 언제인가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설가의 꿈을 꾸었다.

은사 스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는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명을 통해 편지 한 통을 남겨 놓고, 어느 날, 새벽예불을 마친 뒤에 나는 줄행랑을 치듯 금산사를 떠났다. 반면, 원명은 은사 스님의 착한 제자였다. 그는 은사 스님의 바람대로 선승이 되었고, 몇 년 전에 들리는 소식으로는 아직도 금산사에서 가부좌가 터지도록 정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지금도 화림선원 한쪽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지 몰랐다.

나는 미륵전으로 향했다. 삼 층의 육중한 건물이다. 위풍당당한 미륵불상을 보며 나는 마치 고향에라도 온 듯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삼배를 올린 뒤에, 잠시 미륵불상을 우러러보았다. 예나 다름없이 자비로운 모습 그대로였다. 오, 부처님. 미륵부처님.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문득 내가 부처님을 찾아온 거지 아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화경』 「신해품」에서는 ‘장자궁자의 비유’ 이야기이다. 부자 아버지 장자와 거지 아들에 관한 이야기.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하여 타향객지를 떠돌다가 거지가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다른 곳에 머물면서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있는 성으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가 찾지 못하여 한 성에 머물면서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장자로 불렸다.

장자는 아들 생각에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다. 어느 날 거지가 된 아들이 장자 저택에 품팔이를 왔다. 아들은 으리으리한 집에 보배로 치장한 주인이 바라문과 왕족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두려움을 느껴 품팔이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달아났다.

장자는 그 거지를 보고는 그렇게도 찾아 헤맸던 아들임을 알았다. 그는 옆에 시위하고 있던, 옷을 잘 차려입은 시종을 보내 데려오도록 했다. 잡혀 온 거지 아들은 자신은 이제 죽게 될 것이라 지레 겁을 내어 기절하였다.

장자는 아들이 심지가 얕고 졸렬하여 자신을 어려워함을 알고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을 알아보게 했다. 이번에는 방편을 써서 허름하게 생긴 시종을 보내 거지 아들을 꾀어오게 했다. 주인댁에 품팔이할 일이 있으니 같이 가서 똥치는 일을 하면 품삯을 배로 준다는 것이었다. 거지 아들은 똥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화려한 옷을 벗어놓고 초췌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오른손에는 똥치는 그릇을 들고 아들이 일하는 곳으로 가 게으름피우지 말고 일하라고 하였다.

그 후 장자는 아들을 불러 아들 같은 친근감을 느낀다고 하면서 칭찬해 주며 집안일을 도우라고 하였다. 아들은 마지못해 시키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일이 지난 후에 주인댁에 대한 신뢰감이 싹터 출입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 후 장자는 집안의 재물과 창고를 모두 거지 아들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아들은 여전히 대문 밖에 살면서 자기 재물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장자는 아들의 마음이 점점 커 감을 알고 재물을 물려주기 위해 국왕과 친족들을 불러 놓고 선언했다. 이 아이는 나의 아들이고 그동안 50여 년을 떠돌다가 돌아와 살게 되었으니 이제 모든 집과 사람들을 모두 아들에게 맡긴다고. 그제야 거지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기뻐하며 한량없는 보배를 얻게 되었다.

절집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장자궁자의 비유’는 우리가 누구이고 부처가 중생들을 어떻게 교화하는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이 비유에서 장자는 부처를, 거지 아들은 중생을 뜻한다. 아들이 원래 장자의 아들이었듯이 우리 중생들도 원래 부처인 불성을 갖고 있는 불자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하여 50여 년을 떠돌며 거지가 되었듯이, 중생들도 자신이 불자임을, 부처임을 잊어버리고 오도(五道,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를 윤회하며 생로병사의 고통을 받은 중생이 되어버렸다. 거지 아들이 큰 저택에 살고 있는 장자를 차마 자신의 아버지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부처는, 원래, 다른, 존재요, 우리 자신이 곧 불도를 이룰 부처라는 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금산사 미륵부처의 입장에서는 내가 거지 아들로 비추어질지 모르겠으나,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장자를 피해 다니는 거지 아들이 차라리 부러웠다. 머리로는 ‘장자궁자의 비유’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으나, 내가 금산사 미륵전을 찾은 것은 거지아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것이었다. 나는 돌아온 궁자가 아니었다. 또한, 원명을 만나기 위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원명도 관련이 있었다.

금산사 행자 시절, 원명은 대적광전, 나는 미륵전 소제 담당이었다. 금산사에는 많은 전각이 있었으나 특히 미륵전은 내게는 안방이요, 놀이터와 다름없었다. 나는 행자는 물론 사미 시절 대부분을 미륵전에서 보냈다. 행자 시절 나는 스님들 몰래 미륵불상 뒤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때로는 미륵불상 발뒤꿈치에 기대어 잠을 자기도 하였다. 얼마나 달콤했는지. 그곳은 나의 비밀 ‘아지트’였으니까. 현재 미륵보살이 천상 사람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는 도솔천과 같은 정토였다.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금산사 미륵불상에 몸을 기대고 잠을 자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그것은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었다. 아니, 금산사 대중 가운데 딱 한 명,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원명이었다. 반대로 대적광전 상단 밑 공간이 원명의 비밀 아지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때로는 원명과 나, 둘이 같이 미륵불상 뒤편이나 대적광전 상단 밑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예불 시간을 놓쳐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날이면 스님에게 불려가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혼이 나나 일쑤였다. 그러나 개구쟁이들의 반성이란 그때뿐이어서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원광이 너는, 하던 일을 계속하도록 해라.”

나는 행자 시절 3년을 꼬박 미륵전 소제 담당으로 보냈다. 그리고 사미계를 받은 뒤에 주지 스님이 내가 준 소임은 여전히 미륵전 소제 담당이었다. 대개 소제는 행자들이 담당하고, 사미는 강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지만, 내가 주지 스님에게 미운털이 박혔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미륵전 소제 담당은 그대로였다.

“이제 사미계를 받았으니까, 공부도 게을리하지 말고.”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주지 스님은 마지막 어조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예. 스님.”

나는 내심 여유를 갖고 대답했다. 주지스님이 나에게 미륵전 소제 임무를 계속 맡기는 것은, 그가 나의 은사 스님이었으므로 다른 대중에게 보여 주려는 특별한 배려(?)임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주지 스님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사미가 되었다고 해도 나는 나의 정토 미륵전을 떠나기 싫었다. 미륵전 미륵불상 뒤편이야말로 나만의 세계를 즐길 수 있는 나만의 정토였다는 것을 은사인 주지스님은 몰랐을 터다. 그런 내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은 역시 원명이었다. 그는 주지 스님이 내가 계속 미륵전 소제를 담당하라는 명이 떨어지는 순간, 나를 향해 부럽다는 표정을 한껏 담아서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영산회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 보이자, 그 누구도 반응이 없었는데, 오직 한 사람, 가섭이 지었다는 그 은근한 미소와 같이.

“….”

원명을 향해 나는 말없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원명아. 원명아. 걱정일랑 꼭 붙들어 매 두거라 잉. 언제라도 우리 아지트로 오면 되는 거싱게. 나는 그런 이심전심을 침묵으로 속삭이며 나려 보냈다. 실제로 그 후에 원명은 자주 나를 찾아 미륵전으로 왔다. 우리는 행자 시절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행자 때는 우리들의 정토가 두 곳이었는데, 사미가 된 뒤에는 한 곳으로 줄어들었다는 점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미륵불상 뒤편에서 자주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랬는데, 달포 전에, 한류대 정원사 황세운씨가 내게 건네준 책이 잠자는 나의 추억의 사자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노가원, 법명 종상,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