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미륵불
□한국 고승열전 소설 1
한국 미륵신앙의 중흥조
진표율사
노가원 소설가(본지 발행인)
1.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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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한류 현상이 크게는 지구화(globalization), 문화의 혼성화(cultural hybridity), 현지화(glocalization), 문화생산과 수용의 권역화(regionalization), 문화적 근접성(cultural proximity) 그리고 문화수용의 능동성(active reception)이라는, 이 다섯 가지의 서로 관련 혹은 대립하는 힘들의 중층적 영향/결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한 연구자의 지적에 일단 동의하고자 합니다. 한국 대중문화가, K-Pop이, 현재의 한류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는 주장도 없지 않지만, 우리는 일단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한류 문화의 저변에 대한 확충을, 다각도로, 점검해보자는 것이지요. 한류의 미래! 한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리고 나의 과제가 되겠지요. ⋯자.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여섯 명의 학생들이 연구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텅 빈 강의실에서, 나는, 주머니를 뒤져,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물고 창가로 갔다. 몸은, 느긋하지만, 머리 속이, 복잡했다. 아니, 혼란스러웠다. 두 번째 강의였다. 아직도 강단이 낯설었다. 과연 이 직업이 나에게 어울리는 옷일까. 담배 연기를 온몸 깊숙이 삼켰다가 창문을 향해 훅 뿜어냈다. 담배 연기는 안개처럼 사방으로 번졌다.
나는 꿈을 꾼다. 내 기억이 처음 열린 그때부터 지금까지 꿈을 꾸며 살았다. 살고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누구나, 꿈을 꾸며 산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도. 인간은 누구나 꿈을 꾸며 살고 있다. 과연 꿈꾸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뭐,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살아온 그때까지, 참, 혹독한 꿈을 꾸며, 꿈속에서 살아왔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을 당위로 알았다. 꿈꾸지 않는 자는 죽음이다. 주검이다. 과연, 그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선생님은 빨갱이 소설 쓰잖아요. 이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소설은, 안 됩니다.”
평소 잘 알고 있었던 출판사 사장의 그 말 한마디는, 나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 바뀐 세상! 내가 꿈꾸었던 완전한 그런 세상은 아니었지만, 당장에는, 차선책은 된다고 생각하였고, 나는 그 세상을 위해 참 무던하게도 모진 꿈을 꾸며 살아왔는데, 그 결과라는 것이 이건가, 한 편으로는,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아니, 꿈만이 아니었다. 작가로서, 기자로서, 나는, 현실을 피하지 않았고, 덕택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하였던가. 벌건 대낫의 대로상에서, 그것도 다섯 살난 아들이 보는 앞에서 너댓 명의 괴한들에게 불법납치당해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서초동 검찰청 어느 검사 앞에서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 채 조사받기도 했으며, 재판정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불려가, 같은 사내가 봐도 참, 잘 생긴 판사 앞에서, 죄라는 느끼지도 않으면서, 나도 모르게, 쥐어짜듯, 가슴 조여 보기도 했고, 그리고, 또, 감옥에 끌려가 몇 년을 썩고, 삭여야 했던가. 뜻밖에도 돈이 좀 모였을 때는 좀, 생뚱맞게도, 신문사를 차려 온통 그 꿈꾸는 곳에 ‘투자’했다가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하였다. 뭐, 대가를 바라고 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꿈꾸고, 싸웠던 그런 세상에서 비난받을 이유까지는 없지 않은가. 비난이다. 빨갱이 소설이라니! 빨갱이라니!
며칠 뒤, 나는 꿈 하나를 접었다. 절필이다. 참, 부질없이, 많은 글을 남발해 왔다. 변명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름의, 투쟁을 위한 무기였다.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니! 동기부터가 불순했던 것 같기도 하였다. 그것을, 나는 성스러운 것이라고 포장해 왔다. 나는 물론 내 가족을 먹고 살게 하는 글이니, 얼마나, 성스러운가. 또 있다. 내 소설은 민주주의를 위한 무기다! 오. 나는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다. 틀렸다. 틀려도 참, 많이 틀렸다. 내, 오만을, 나는 그렇게 포장했던 거다. 죄송하게도 그분, 붓다의 말씀을 빌린다면, 나는 한 마디의 글도 쓰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그동안 내가 쓴 글을, 하나도, 쓰여서는 안 되는 글이었다. ‘빨갱이 소설’이라는 비난을 들어서가 아니다. 그, 소리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게시같은 것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달여 동안 아파트 방구석에 틀어박혀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병이 찾아왔다. 참, 무지막지한 병이었다. 며칠 동안을 끙끙거리며 신열을 앓았다. 죽을 고비라는 생각이 몇 번씩이나 들었다. 무식하게도, 버텼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속셈이었다. 고개 하나를 넘으면 큰 병원이 있었다. 원자력병원이다. 암 전문 병원이지만, 뒷날 아내에게 들었던 소리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긴 기껏해야 1km 남짓 떨어진 병원을 119구급차에 실려 갔을 정도였다니까.
병원에 실려 온 그날부터 나는 또 하나의 경계와 싸워야 했다. 아니, 경계 앞에, 문턱 앞에서, 혼자 괴로워하며 몸부림쳐야 했다.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게 된 나는 2인실에, 강제, 입원을 당했다. 입원 첫날부터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7월의 여름 날씨는 지상의 모든 것이 불타는 듯한 무더위였다. 병실에는 에어컨조차 틀 수 없었다. 같은 병실에 입원한 환자가 찬 기운을 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암 환자였다. 강원도 강릉에서 왔는데, 30년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달 앞두고 암으로 판정받은 환자였다. 그것도, 췌장암이라고 하였다.
그는 1주일 만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퇴실했다. 바로 내 옆에서. 나는, 그 환자가, 죽어가는 것을, 똑똑하게, 보았다. 볼 수밖에 없었다. 그 환자가 누웠던, 침대는, 하루를 다 채우지도 않고 주인이 바뀌었다. 다음에 들어온 환자도 암 환자였다. 그렇게 한 달여를 입원하는 동안,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암 환자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랬는데, 회진 나온 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정밀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것을 알겠지만, 암일 수도 있습니다.”
흰 가운은, 안개같이 뿌연, 흰 가운을 입은 의자는, 나름 나를 생각해 준다는 양, 미소를 지을 듯 말 듯 하현달처럼 아니 하회탈의 그 가느다란 실눈을 하고, 매우 인자한 눈빛으로, 귀뜸하듯, 말해 주었다. 뒤에, 좀 여유를 갖고 생각해 보면 그 의사는 아주 틀린 얘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암일 수도 있다고 했지, 암이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는 소리를 좀 과하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와 아내의 귀에는 왜 암이라는 진단으로 알아들었을까. 지레 겁을 먹은 탓인지 몰랐다. 원자력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여 동안 나는 적지 않은 암 환자의 최후를 목격하였다. 오늘 밤에 살아서 우리와 얘기를 나누었던 환자가 다음 날 아침에는 주검이 되어 사라졌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따라서 회진 의사의 그 말 한마디는 우리에게 일종의 사형선고와 같은 울림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간호하던 아내는 벌써 훌쩍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냥, 진공상태에서 한동안 멍하니 어두컴컴한 병실 천정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1주일 뒤에 나온 결과는, 엉뚱하게도, 늑막결핵이라는 판정이었다.
다시, 두 달여 동안 원자력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는 동안, 나는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서울을 떠나는 꿈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에 온 이후 20년이라는 세월을 서울에서 살았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참, 오래,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절필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앞으로 소설을 쓰지 않겠다. 내 결심을, 각오를 들은 아내의 얼굴에는 벌써 걱정의 빛이 완연하다.
그때 나는 아내에게 한 마디 말을 툭 내뱉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 되겠지.”
아내는 반응이 없었다. 늘 그랬으니까. 아내의 바로 그런 점이 나를 옭아매는 무기가 되었다. 차라리, 아니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앙칼지게 부정이라도 한다면, 나는 더욱 강하게 튀어 나갔을 터다. 그러나 아내는 어떤 일이 닥치면 천 근 바윗덩어리같이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침묵 앞에 무릎을 꿇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모든 것을 털고 나니까 홀가분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는데, 승리의 여신이 아내의 머리 위에서 흰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때 나에게 손을 내민 것은, 대전 근교 계룡산 천왕봉이 한눈에 올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한류문화대학원대학교(이하 ‘한류대’로 줄임)라는 긴 이름을 가진 대학원대학교 교수 자리였다. 앓고 있는 병이 완치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나는 복부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차를 직접 몰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