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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用變不動本’과 ‘互體互用’의 상관성- 6이 왜 81의 중심에 있는가?

구고 편집위원

김일부는 3극을 말할 때,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다시 미래로 흘러간다는 직선형 시간관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물리적 시간을 시간이게끔 해주는 근거로서의 시간성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즉 현실의 수많은 시간의 흔적을 존재자存在者(things)로, 시간성은 존재存在(being) 문제로 환원시켰다. 하도의 내부 구조인 3극의 창조성과 시간성을 분석함으로써 우주는 왜 선천과 후천으로 구성되었고, 앞으로 후천은 어떤 필연 법칙으로 전개되는가를 체용 문제로부터 해명하였다.

『천부경』 81자의 중심은 물론 하도의 중심에 6이 있다는 사실은 하도가 주체가 되어 이 세상을 이끈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그러면 낙서가 하도로 바뀌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가 필요한가? 태모太母 고수부高首婦(1880-1935)는 “대도통은 육[六]으로 되느니라”고 했다. 선천 낙서의 5가 후천 하도의 6으로 바뀌어야 도통이 실현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본체와 작용의 극적인 전환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천부경』에서 본체와 작용의 전환을 시사하는 명제는 ‘작용이 움직이지 않는 본체로 변한다[用變不動本]’에 있다. 이때 ‘변變’이 기능․작용(function)이라면, ‘본本’은 실체實體(substance) 또는 실재實在(reality)일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기원 역시 『환단고기』에서 찾을 수 있다. 역도易道의 발전 과정은 시공간 구성의 세 요소인 ‘원․방․각’의 체용 문제와 동일한 궤도를 걸었다고 밝혔다.

“환역桓易은 체원용방軆圓用方, 즉 둥근 하늘을 창조의 본체로 하고, 땅을 변화의 작용으로 하여 모습이 없는 것에서 만물의 실상을 아는 것이니, 이것이 하늘의 이치이다. 희역羲易은 체방용원軆方用圓, 즉 땅을 변화의 본체로 하고, 하늘을 변화의 작용으로 하여 모습이 있는 것에서 천지의 변화를 아는 것이니, 이것이 하늘의 실체이다. 지금의 역은 호체호용互軆互用, 즉 체와 용을 겸비하여 있다. 사람의 도는 천도의 원만함(○)을 본받아 원만해지며, 지도의 방정함(□)을 본받아 방정해지고, 천지와 합덕하여 하나(천지인 삼위일체, △)됨으로써 영원한 대광명의 존재[太一]가 되나니, 이것이 하늘의 명령이다.”

「소도경전본훈」은 환역桓易이 희역羲易으로, 희역이 지금의 역[今易]으로 발전한 밑바탕에는 ‘체원용방軆圓用方’ 혹은 ‘체방용원軆方用圓’의 체용관이 깔려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본체와 작용을 바라보는 인식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환역 시대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희역 시대에 이르러 바뀌었고, 지금은 다시 체용을 겸비하는 시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역사와 사물을 바라보는 기준과 준거가 바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도경전본훈」에 나타난 체원용방軆圓用方 혹은 체방용원軆方用圓을 『천부경』의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 논리를 비교하면 하도와 낙서는 ‘서로를 머금다’는 관계 개념을 넘어서 본체와 작용이 서로의 역할을 교체한다는 의미가 더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작용이 움직이지 않는(불변하는) 본체로 변한다[用變不動本]”는 말은 곧 작용이 본체로 전환됨과 동시에 본체 또한 작용으로 바뀐다는 말과 똑같다. 이런 의미에서 「소도경전본훈」에 나오는 “체와 용을 겸비하여 있다[互軆而互用]”는 말에서 ‘호互’를 ‘서로 함께’라는 풀이보다는 ‘서로가 갈마든다’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도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작용이 본체로 환원되어야만, 즉 9수 낙서가 10수 하도로 전환되어야 ‘일적십거一積十鉅’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원방각’이 지향하는 이념과 가치가 온 세상 곳곳에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自圓而圓, 自方而方, 自角而角.]

‘호체호용’의 핵심은 곧 ‘용변부동본’의 체용 전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천부경』의 ‘용변부동본’에서 유래하여 「소도경전본훈」의 ‘호체호용’으로 다시 태어났을 따름이다. 따라서 『천부경』을 읽는 최상의 방법은 하도낙서, 특별히 81자의 중심에 존재하는 6이 곧 하도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 있다. 결국 ‘용변부동본’과 ‘호체호용’에서 체용 전환 논리의 유래를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은 19세기 조선땅에서 출현한 『정역』에 이르러 활짝 꽃피웠던 것이다.

김일부는 천문학에서 말하는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보다는 하도와 낙서를 본체와 작용 및 ‘원’과 ‘방’을 구분하는 논리를 펼쳤다. 1․3․5․7․9의 홀수는 낙서 또는 ‘원圓’으로, 2․4․6․8․10의 짝수는 하도 또는 ‘방方’으로 규정했다.

“선천은 방을 본체로 삼고 원을 작용으로 삼으니, 27삭만에 윤달이 든다. 후천은 원을 본체로 삼고 방을 작용으로 삼으니, 360일이 바로 1년(돌)이 된다. 원천은 무량하다.”

천문학에서 말하는 천원지방은 하늘이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모양새에 높은 비중을 둔 관점이다. 그러나 『정역』은 홀수와 짝수를 나눈 다음에, 다시 선천과 후천에 입각하여 체용 관계로 설정하였다. 또한 홀수는 낙서를, 짝수는 하도라고 규정하고 역법과 소통시켰다. 이것이 곧 『정역』을 꿰뚫고 있는 핵심인 것이다.

선천은 ‘하도체河圖體, 낙서용洛書用’으로, 후천은 ‘낙서체洛書體 하도용河圖用’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선천은 하도가 본체요 낙서로 작용하는 역법이므로 3년에 한 번씩 윤달을 둔다. 초하루를 스물 일곱 번 쓰는 역법은 곧 3 × 9 = 27에 기초한다. ‘9’는 하도 10에 비해 1이 모자라는 낙서의 극한을 나타내는 수이다. ‘3’의 유래는 무엇인가? 홀수로 형성된 원圓은 지름이 1, 원둘레는 3이라는 공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짝수는 사각형 둘레의 외형이 비록 4이지만, 실제로는 2이다. 그래서 양은 3, 음은 2이라는 ‘삼천양지’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성리학性理學은 이 세상이 생기기 이전이 선천 즉 하도의 본원[本體]이며, 하도의 프로그램에 따라 선악이 혼재된 현실로 나타난 낙서의 세상[作用]이 곧 후천이라고 전제한다. 선천의 본체는 불변이므로 체용의 전환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성리학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은 작용의 세계에서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가치의 근원을 비롯한 모든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을 본체에서 찾았던 까닭에 애당초 체용의 전환 논리가 성립할 수 없었다. 애당초 본체와 작용의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다르게 김일부는 성리학을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체용 전환의 논리를 정립했다. 『정역』 상수론의 요체는 하도낙서에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체용 전환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의 시간대(선천)를 중심으로 보면 낙서의 작용[用]이 본체[體]인 하도의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 관계가 바뀌면[互體互用, 用變不動本] 후천은 낙서가 본체요, 하도가 작용으로 전환되는 논리가 성립한다.

성리학은 본체와 작용이 서로 떼려야뗄 수 없는 함수 관계로 존재한다고 했다[體用一源, 顯微無間]. 본체는 불변의 실재이고, 작용은 가변성의 세계라고 설정하면서 이상과 현실의 범주로 이원화했다. 하지만 김일부는 본체와 작용의 역전 논리를 개발하여 새로운 시공 질서가 수립되는 이치를 해명함으로써 정역사상의 확고부동한 객관성과 합리성을 보강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