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능가경』과 보살수행

종상스님(본지 발행인)

대부분 경전에는 청법자(請法)을 하는 질문자가 있고, 이에 답변하는 부처님이 있다. 답변자는 부처님의 인정을 받은 보살이나 장자가 대신하기도 한다. 물론 질문자 없이 부처님 스스로 설한 자설(自說) 경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미타경』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부분 경전은 질문자/답변자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능가경』의 경우, 질문자는 대혜(大慧)라는 보살이다. 그는 ‘보살마하살’로 표현되어 있다. ‘보살마하살’은 보살을 높여 부르는 말로 보리살타 마하살타(菩提薩埵 摩訶薩埵, bodhisattva-mahāsattva)의 줄임말이다. 보살은 산스크리트어 bodhissattva의 음사이다. 부처님과 같은 깨침을 얻으려고 수행하는 사람, 대승불교에 귀의한 사람, 큰 서원을 세우고 육바라밀을 수행하며,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목적으로 자리이타행을 닦아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줄여서 ‘보살’이라 한다. ‘마하살’은 산스크리트어 mahā-sattva의 음사로 위대한 존재·중생·사람이라는 뜻이다. 보살을 한껏 높여 일컫는 말이다. 『능가경』 서분(序分)에 해당하는 앞부분에서 대혜보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갖가지 보배 꽃으로 장엄한 남쪽 해안가 능가산(楞伽山) 정상에서 대비구승과 여러 다른 불국토에서 찾아온 대보살 무리와 함께 계셨다. 이 모든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삼매와 자재력과 신통력으로 유희하였으며, 대혜보살마하살을 우두머리로 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 손수 그들의 정수리에 물을 부어 주시니, 스스로 마음에 나타난 경계에 대해서 그 뜻을 잘 알게 되었으며, 온갖 중생의 갖가지 심색(心色)과 한량없이 많은 해탈의 문이 근기에 따라 두루 나타났다. 그리고 다섯 가지 법과 자성과 식(識)과 두 가지 무아를 구경까지 통달하였다.

경전의 첫 문장의 내용이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형식인 육성취(六成就) 부분이다. 여기서는 특히 청법자인 대혜보살은 물론 보살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여러 다른 불국토에서” 왔다는 ‘불찰(佛刹)’은 부처님이 머무는 불국토를 의미한다. 보살들이 여러 다른 불국토에서 모여왔다는 언설을 통해서 그들의 지위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보살들이 ‘한량없는 삼매와 자재력과 신통력으로 유희하였다’는 표현에서 각자 그들이 어떤 행위의 과보를 받아서 누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어떤 행위’란 보살들이 실천해 온 수행을 가리킨다. 수행의 과보로서 보살이 지금 유희하는 경지는 한량없는 삼매와 자재력과 신통력이다.

유정으로서 어리석지 않은 자, 즉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가 보살이다.

보살 사상은 대승불교 교리 중 핵심적인 문제의 하나이다. 보살은 대승불교의 상징이다. 대승사상과 초기불교 사상과의 분기점은 그것이 성문과 연각의 이승사상(二乘思想)인가 보살 사상인가 하는 데 놓여 있다. 초기불교 경전과 대승 경전의 차별, 즉 식별의 기준은 보살 사상의 유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승불교 교리 중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보살 사상이고, 대승 경전은 곧 보살 사상으로써 착색되어 있다. 상좌부 불교가 이승으로서 자리 중심의 수행을 통해 열반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때, 대승불교는 보살로서 이타 중심의 수행을 통해 성불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수행 요목이나 방법 등의 교리 내용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보살의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에서 bodhi(菩提)는 ‘깨달음’을 의미하고, sattva(薩埵)는 본질ㆍ실체ㆍ마음ㆍ태아ㆍ용사ㆍ유정 등을 의미한다. bodhi는 본래 자각하다는 의미의 ‘budh’에 근거한 말로서 지혜, 깨달음, 부처의 지혜에 해당한다. 또 sattva는 원래 ‘as(있다, 존재한다)’를 어원으로 하는데 생명이 있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서 사용되는 의미를 살펴보면, 보살은 보리를 구하는 유정, 보리를 얻게 될 것이 확정된 유정, 가장 지혜 있는 유정, 지혜를 지닌 유정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타의 깨달음을 추구하여(自利) 열반으로 나아가고 아울러 일체중생을 구제하여 열반으로 이끌려고 노력하는(利他) 수행자를 일컫는다. 다시 말하면 중생을 구제하는 행위 자체를 수행으로 삼는 자를 보살이라고 한다. 따라서 상구보리 하화중생는 보살의 수행 목표를 자리와 이타의 측면으로 표현한 불교교리로 통용되고 있다. 대혜를 상수로 하는 보살들이 자리와 이타를 완성하고자 용맹정진하는 사람이므로 『능가경』의 앞 인용문에서 마하살(摩訶薩, 大士, mahasattva)로 표현하였다.

이 살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않았을 때, 강한 의지로써 항상 보리를 수순하여 즐기고, 보리를 향하여 나아가고, 보리를 친근하고, 보리를 좋아하여 즐기고, 보리를 존중하고, 보리를 갈앙하고, 보리를 하기 위하여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쉬지도 않고, 보리를 구하는 마음을 잠시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보살타라고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정진수행하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상좌부계 논서이자만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보살이 초발심으로부터 3무수겁(三無數劫)을 지나면서 여러 가지 난행고행을 닦았다고 하더라도 묘상업(妙相業)을 닦지 않은 동안은 아직 진실보살(眞實菩薩)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진실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리를 결정해야 하고, 취(趣)를 결정해야 한다. 보리를 결정한다는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보리를 얻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며, 취를 결정한다는 것은 지옥 · 아귀 · 축생의 3악취가 아닌 선취(善趣, 人天)에 태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두 조건이 갖추어 졌을 비로소 진실보살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보리를 결정하였더라도 취가 결정되지 않았으면, 아직 진실보살이라고 부를 수 없다.

보살은 비록 3무수겁을 지나면서 여러 가지 난행고행을 두루 닦았다 하더라도 묘상업을 닦고 익히지 않는다면, 오히려 '나는 보살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 보살은 처음 무수겁이 다 찼을 때는, 여러 가지 난행고행을 갖추어 닦았을지라도, 아직 부처가 되었는 지 어떨지를 스스로 알아도 결정하지 못한다. 제2 무수겁이 찼을 때는 비록 부처가 될 것을 스스로 알아도 결정하지 못한다. 아무 두려움 없이 ‘나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는 아직 감히 말하지 못한다. 제3 무수겁이 차고 나서 묘상업(妙相業)을 닦았을 때 비로소 ‘나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라는 것을 알고, 또한 두려움 없이 사자후를 발하고, '나는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을 가지런히 하여야 보살이라고 하는가? 상이숙업(相異熟業)을 조작하고 증장할 수 있어야 보살이라고 한다,

보살이 묘상업을 행하는 것을 상이숙업을 닦는다고 한다. 『대비바사론』 제177권에 “이 상이숙업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나야 닦고 익힘이 원만합니까?”라는 질문에 “대체로 백 대겁(百大劫)을 지나야 한다. 다만 석가보살만을 제외한다. 석가보살은 지극히 정진하였기 때문에 9대겁을 뛰어넘어 91 겁만 지나면 수습이 원만해진다.”라고 하였다. 보살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원(願)을 세워야 한다. 『구사론』에서는 3겁에 걸쳐 6바라밀 등 많은 원력과 수행을 통하지 않으면 불과를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무상보리는 얻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보리를 구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원을 세우는 것은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다른 방편으로도 열반을 얻을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보리를 위하여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고행을 닦아야 하는가? 일체 유정을 이익되게 하고 즐거워지게 하려고 보리를 구하여 오래도록 원을 세우는 것이다.

원을 세우고 백 대겁에 걸쳐 수행해야 하는 보살은 성불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을 제도함으로써 자기의 비심(悲心)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남을 제도하는 것을 바로 자기의 이익으로 삼는다. 보살은 중생을 제도함으로써 자기의 성취한다. 그러므로 남을 제도하는 것을 바로 자기의 이익으로 삼는다. 비록 자기는 괴롭더라도 남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항상 부지런히 구하며, 남의 괴로움을 영원히 없애려고 한다. 그것은 남을 자기로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보살은 자리이타를 행원으로 하는 자이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성문이나 연각보다도 높은 지위라고 주장하는 것은 처음 발심할 때부터 이미 상구보리 외에 하화중생이라는 대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용수는 『대지도론』에서 보살이란 무상정각을 성취하기 위해서 큰마음을 일으킨 자이며, 큰마음을 일으켜서 무상보리를 구하지만, 아직 성취하지 못한 자를 말한다고 하였다. 큰마음을 일으켜 상구보리하고 있는 자를 보살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집이론(部執異論)』에서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악도(惡道)에 들어간다.”라고 하여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악도에도 들어가는 자라고 하였다.

『능가경』은 시작부터 수많은 대보살이 등장한다. 대혜보살을 상수로 하는 이들 대보살들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수행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성불하기 전까지는 수행을 멈출 수 없다. 『대지도론』에 의하면 부처는 보살과 달리 무상정각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무상정각을 성취하였으므로 큰마음은 이미 만족스러원 지위이다. 그러나 보살은 넓은 의미에서 아직 수행자이다. 물론 성문·연각 등도 수승한 수행자이다. 그러나 보살의 위상을 이승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능가경』은 성문승에 대해 온ㆍ계ㆍ처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말하는 것을 듣고 알거나 증득하여 온 몸의 털을 세우고 마음에 닦고 익히기를 좋아하지만, 연기의 모양을 관찰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상과 공상을 멸하여 몸으로 열반을 얻어서 사성제의 법문을 듣고 환희심을 내어 그 법을 닦아 깨달아 얻지만, 이것으로 만족하여 연기의 법에 대해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수행자이다. 연각승은 두 종류로 분류한다. 하나는 연각승이다. 부처님이 설하는 12인연의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존재이다. 다른 하나는 독각승이다. 부처님이 없는 세상에 태어나 연기의 법을 스스로 보고 깨닫는 존재이다. 연각승의 경계에 대하여 『능가경』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대혜여, 어떻게 연각승의 종성을 아는가? 말하자면 만약 연각승의 법을 듣고 온몸의 털을 세우고 눈물 흘리며 슬피 울고 심란하고 시끄러운 인연을 떠나 물들어 집착함이 없고, 때로 갖가지 몸을 나타내어 혹은 모으고 혹은 흩어지는 신통변화에 대하여 말함을 듣고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어서 어기거나 거스름이 없으면 반드시 알라. 이는 연각승의 종성이다.

연각승은 연기법에 대하여 설하는 것을 듣고, 인연의 체가 공함을 알아 집착함이 없으며, 신통변화에 대하여 설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믿고 받아들여 닦아 익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승은 수행을 통해 삼매에 들어 습기의 힘이 미세해지면 이것을 느끼지 못하고 단지 모든 식이 멸하여 삼매에든 것으로 착각을 일으킨다. 이 상태는 삼매에 의해 습기의 종자가 멸한 상태가 아니라 단지 대상을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일 뿐이다. 『능가경』은 이러한 이승의 상태에 대하여 “성문ㆍ연각은 자상과 공상을 알아 심란하고 시끄러움을 버리고 떠나 전도됨이 생기지 않고 분별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그들은 그 가운데서 열반이라는 생각을 낸다.”라고 질책한 뒤에 “그들은 해탈이 없으니 법무아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성문승과 외도의 종성이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서 벗어났다는 생각을 낸다.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 이런 나쁜 견해를 버려야 한다.”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수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모든 성인의 가르침에 의하여 분별함이 없이 홀로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서 관찰하여 스스로 깨닫는다. 다른 이를 연유하지 아니하고 깨달아 분별하는 견해를 떠나 위로 계속 올라가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수행함을 자증성지행상(自證聖智行相)이라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보살은 깨달음을 구해서 수도하는 중생, 구도자, 지혜를 가진 자이다. 보살은 대승불교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보살 사상의 기본적인 두 개념은 서원(誓願)과 회향(回向)이다. 전자는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이며, 후자는 자기가 쌓은 선근공덕을 남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회향이다. 보살은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머물 것을 자원한 존재이다. 흔히 일체의 중생을 먼저 깨달음의 세계(彼岸)에 도달하게 하는 뱃사공과 같은 자로 비유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