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sophia-lasheva-CAYwb88-xp8-unsplash


■황희순 시

초파리의 거울

황희순

초파리는 제 피가 붉다는 걸

알고 있을까

벽에 붙은 그를 친 손바닥에

쉼표만 한 피가 한 점 묻어났다

심장이 있었던 거니

붉은 네 심장을 내가 터트린 거니

죽은 듯 고요한 나날

벼랑의 현기 견디는 너를

밀어버린 거니

이 고요 어떻게 뼈져나갈까

궁리하는 너를 지워버린 거니

맘 놓고 앉아있을 곳은 없단다

두리번대다 지워진 목숨이

어찌 너뿐이겠니

한밤을 지키는 별은 모두

이 땅에서 지워진 눈빛

너도 별이 되겠구나

내가 별이 될 때까지 나를

지켜보겠구나

■황희순 시

자폐

황희순

이봐요,

자기 가슴을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는 거 아니에요

그 안에 바닥없는 벼랑이 생길지 몰라요

다시 살고 싶어져도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어요

움푹 파인 당신의 절망과 절망과 절망 사이

계단이 있어요, 벼랑이 보이기 전에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서요

이 땅에 사람답게 필 기회

꼭 한 번뿐이에요

어서요

■황희순 시

그 자리

황희순

마늘밭둑 쪼그려 앉은

팔순은 되어 보이는 노인

曰,

싹이 났네

아이구우 저거 줌 봐아

마늘 심으믄 마늘 나구

파 심으믄 파 나구우

백만 번쯤 보고 또 보다보면

하나마나한 말도

특별해지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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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순黄姫順 시인 약력

1956년 충북 보은군 회남면에서 태어났다.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고, 시집으로 『강가에 서고픈 날』(1993), 『나를 가둔 그리움』(1996), 『새가 날아간 자리』(2006), 『미끼』(2013)를 냈으며, 시집 『미끼』로 충남시인협회 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대전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