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적 계약 없어도 위탁관계 성립…임의로 재산 빼면 횡령"
사찰 관리자, 주지스님 사망하자 상속인 동의 없이 상좌스님에 억대 돈 건네

대법 "통념·신의칙 비춰 재산 관리자로 봐야…보관의무 지키지 않으면 횡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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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경 [연합뉴스TV 제공]

(기사발신지=연합뉴스) 이도흔 기자 = 사망한 주지스님의 재산을 상속인 동의 없이 임의로 처리한 사찰 승려와 관리자를 횡령 혐의로 처벌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노경필 대법관)는 횡령, 사전자기록 등 위작 및 위작교사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와 B씨의 횡령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지난달 17일 사건을 서울북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서울의 한 사찰 사무를 주재하는 A씨는 2000년부터 사찰 주지스님의 은행 계좌를 관리해왔다.

그러던 중 2022년 3월 주지스님이 사망하자 A씨는 상속인 동의 없이 사찰의 상좌(제자)스님인 B씨에게 주지스님 계좌에 보관된 돈 2억5천만원을 수표로 건네거나 계좌로 이체했다.

검찰은 A씨와 B씨가 공모해 상속인을 피해자로 한 횡령죄 등을 저질렀다며 기소했다.

상속인과 A씨 사이에는 사망한 주지스님 재산에 대한 위탁관계가 성립해 보관의무가 발생하는데 A씨 등이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취지다.

1심은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해 A씨와 B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각각 80시간, 12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2심은 이들의 횡령 혐의는 무죄로 판단하고 A씨 등이 계좌이체를 하며 사망한 주지스님 명의의 예금청구서를 허위로 작성한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다.

2심 재판부는 A씨와 상속인 사이에 주지스님의 재산에 대한 위탁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주지스님 사망 이후 상속인이 A씨에게 재산을 보관해달라고 부탁하는 등 A씨와 상속인 사이 재산 위탁에 관한 명시적 계약이 체결된 적 없다는 이유다.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혔다.

대법원은 횡령죄로 처벌하는 게 맞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A씨가 주지스님 위임으로 통장, 현금카드 등을 보관하고 있던 점을 지적하며 "A씨는 망인의 위임에 따라 계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로서 조리(사회적 통념) 또는 신의성실 원칙에 비춰 피해자인 상속인의 재산을 보호·관리하는 지위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주지스님의 사망으로 A씨와 주지스님 사이 (재산에 관한) 위임이 종료됐다고 보더라도, A씨는 민법에 따라 위임사무의 처리로 인해 받은 금전 또는 기타의 물건 등을 반환할 의무를 부담한다"며 "상속인과 형법상 위탁관계까지 종료됐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leed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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