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표지. 자료사진 _삼성현역사문화관
『삼국유사』를 다시 읽는다. 『삼국유사』는 고려 25대 왕인 충렬왕(재위 1274~1308) 시대에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1206∼1289)이 편찬했다. 일반적으로 1280년 무렵이라고 한다. 『삼국유사』는 어떤 책인가? 『삼국유사』는 흔히 사서로 알려졌다. 사람이든 책이든 첫인상이 중요하다. 한 권의 책을 마주할 때, 첫인상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제목이다. 『삼국유사』는 제목부터가 사서로 읽힌다. 고구려·백제·신라를 지칭하는 ‘삼국’이라는 단어가 강한 인상을 풍기는 까닭이다. 흔히 『삼국유사』라고 하면, ‘쌍둥이’처럼 떠올리는 책이 있다.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전기의 문신 김부식(金富試, 1075~1151)이 1145년(인종 23)에 편찬한 관찬사서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유사』는 쌍둥이?
『삼국유사』의 ‘유사’만 해도 그렇다. ‘유사’의 사전적 의미는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사적(事跡)을 가리킨다. 여기서 ‘사적’이라는 문자가 걸린다. 사적은 ‘史跡’ 혹은 ‘史蹟’으로 오해하기 쉽다. 두 낱말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시설의 자취를 가리킨다. 이 뜻을 따라가다 보면 『삼국유사』의 첫인상은 역시 사서만으로 각인될 수 있다. 많이들 그렇게 오해 아닌 오해를 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까 『삼국유사』를 마치 『삼국사기』와 동전의 양면인양 떠올리게 된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내용을 기록한 사서라는 꼬리표가 그것이다.
『삼국유사』가 사서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다. 『삼국유사』는 사서가 맞다. 그러나 사서를 넘어선다. 『삼국유사』의 ‘유사’에서 사적은 한자 ‘事跡’이다. 이 사적의 사전적 뜻은 사업의 남은 자취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신화(神話)도 사적을 얘기한다. 신화의 사전적 의미는 문학 고대인의 사유나 표상이 반영된 신성한 이야기이다. 우주의 기원, 신이나 영웅의 사적(事績), 민족의 태고 때의 역사나 설화 따위가 주된 내용이다. 다른 뜻도 있다. 신화는 신비스러운 이야기이다. 또 절대적이고 획기적인 업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삼국유사』에는 이런 의미를 담보하는 사적을 기록한 책이다.
▲삼국유사 왕력편. 자료사진 _삼성현역사문화관
『삼국유사』 일연과 『삼국사기』 김부식
『삼국사기』 애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삼국유사』의 문자적, 양식적 행위는 『삼국사기』의 그것을 훨씬 넘어선다. 『삼국유사』는 이른바 ‘유사’들이 편찬자의 불교적 체험과 함께 다양한 풍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와 극명한 차이는 『삼국사기』가 왕명에 의해 편찬된 관찬 사서라면,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이 편찬한 사찬(私撰)이라는 점이다. 『삼국유사』가 그만큼 자유롭게 편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부식은 유학자로서 유교적 합리주의와 인본주의에 따라 공자가 주창한 ‘술이부작(述而不 作)’의 태도를 역력하게 보여준다. 반면 일연은 불교적 초월주의 내지는 신화적, 종교적 세계관에 의해 세속계와 신성계가 접합한 사건을 중시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지적이지만, 다른 문제도 지적할 수 있다.
왕의 스승 국존(國尊)이 기록한 『삼국유사』
『삼국유사』에는 고대 사회의 역사, 종교(불교)와 함께 문학, 예술, 풍속, 언어 등과 같은 다양한 사상(事象)들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고대 역사와 불교, 문화의 고귀한 백과사전이다. 누군가 얘기했다. 『삼국유사』는 역사학을 비롯하여 신화학· 국문학· 민속학· 불교학의 성전이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을 출발점으로 국통을 세우고 우리 역사의 가닥을 잡은 일은 기념비적인 『삼국유사』는 대내·외적으로 격동과 혼돈, 암흑의 소용돌이 시기, 민족과 국가의 자존을 지키려 했던 기념비적인 기록물이며, 작자 일연의 불교 사상과 경험 그리고 토착신앙과 문화를 통합적으로 기록한 보감(寶鑑)이다.
『삼국유사』가 사찬이라고 해서, 그것이 자연인 일연 개인의 자유로운 기록물로 이해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일연은 왕의 스승 국존(國尊)이었다. ‘국존’은 고려시대의 원간섭기에 덕망 높은 고승에게 내린 관직 중의 하나이다. 국사(國師)의 다른 명칭칭으로 보면 된다. 일찍이 신라 시대부터 고승을 임금의 스승으로 책봉한 제도가 있었다. 고려도 이 제도를 계승하였다. 말하자면 국존은 신라·고려시대에 있었던 승려의 최고 법계였다. 왕의 스승, 국존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개인적인 사건이라고 해도, 그것이 과연 개인적인 일로 끝날 일이겠는가. 일연 개인의 학문적 취향도 없지 않았겠지만, 과연 ‘사찬’의 자유로움에만 한정될 수 있었을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이 경우에 한정한다면, 『삼국유사』에서 토착적이고 무속문화적 신이담(神異譚)의 가치를 인정하는 한편, 『삼국사기』에서 빠진 상고 역사 기록을 『삼국유사』 권1, 2의 「기이(紀異)」편에 집대성한 풍경에서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학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