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미륵전


□한국 고승열전 소설 [4]

한국 미륵신앙의 중흥조

진표율사

노가원 소설가(본지 발행인)

4

황세운 씨에게 『도전』이란 책을 빌려온 나는 며칠 동안 밤을 새우다시피 읽어 내려갔다. 그중에서도 내 어린 시절의 추억과 직접 관련이 있는 내용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좀 길지만 있는 대로 인용한다.

상제님께서 임인(壬寅 : 도기道紀 32, 1902)년 4월 13일에 전주 우림면 하운동(全州 雨林面 夏雲洞) 제비창골 김형렬의 집에 이르시니라. 이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심회를 푸시고 형렬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조화로써 천지운로를 개조(改造)하여 불로장생의 선경(仙境)을 열고 고해에 빠진 중생을 널리 건지려 하노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본래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개탑(天蓋塔)에 내려와 천하를 두루 살피고 동양 조선국 금산사 미륵전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다가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내려왔나니, 이제 주인을 심방함이니라.” (증산도 도전 2:1:1-85)

나의 일은 비록 부모, 형제, 처자라도 알 수가 없나니 나는 서양 대법국 천개탑 천하대순이로다. 동학 주문에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나니 천지간의 모든 신명들이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나에게 탄원하므로 내가 천조(天朝)의 대신(大臣)들에게 ‘하늘의 정사(政事)를 섭리하라.’고 맡기고 서양 천개탑에 내려와 천하를 둘러보며 만방의 억조창생의 편안함과 근심 걱정을 살피다가 너의 동토(東土)에 인연이 있는 고로 이 동방에 와서 30년 동안 금산사 미륵전에 머무르면서 최제우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주었더니 조선 조정이 제우를 죽였으므로 내가 팔괘 갑자(八卦甲子)에 응하여 신미(辛未 : 道紀 1, 1871)년에 이 세상에 내려왔노라.(증산도 도전 2:94:1-7)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 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하늘의 모든 신성과 부처와 보살이 하소연하므로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이마두가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내려와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둘러보며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중 진표(眞表)가 석가모니의 당래불(當來佛) 찬탄설게(讚歎說偈)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至心祈願)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甲子 : 道紀前 7, 1864)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辛未 : 도기 1, 1871)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수운가사(水雲歌詞)에서 말하는 ‘상제’는 곧 나를 이름이니라.(증산도 도전 2:30:8-17)

자신이 미륵불이라고 스스로 밝힌 증산 상제가 인간을 온 과정을 밝힌 기록들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전체 내용도 그렇지만, 특히 나를 놀라고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미륵불인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온 과정에서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상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렀다는 부분이었다. 내가 행자와 사미 시절을 포함하여 6년 동안 매일 쓸고 닦았던 금산사 미륵전, 바로 그곳에 증산 상제가 30년 동안 임하였다가 인간으로 왔다! 이 밖에도 『도전』에는 증산 상제가 금산사 미륵불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은 많았다. 그렇게 인간으로 와서 당신의 일을 마친 증산 상제는 다시 금산사 미륵전을 통해 천상으로 환궁하였다. 다시 인간으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너무 악하여 몸둘 곳이 없으므로 장차 깊이 숨으려 하니 어디가 좋겠느냐?” … 잠시 후에 “나는 금산사에 가서 불양답(佛糧畓)이나 차지하리라.” 하시니라. 또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미륵이니라. 금산사 미륵은 여의주를 손에 들었거니와 나는 입에 물었노라.” 하시고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 미륵불을 보라. 금산사 미륵불은 육장(六丈)이나 나는 육장 반으로 오리라.” 하시니라.(증산도 도전 10:33:1-7)

『도전』 기록에서 나는 더욱 놀라고 당혹스럽게 만든 다른 구절은 “중 진표가 석가모니의 당래불 찬탄설게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이라는 부분이었다. 금산사 중창조로서 진표율사라면 나로서는 행자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터라 모를 리 만무하였다. 그러나 위의 구절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바로 그 금산사에, 금산사 미륵전과 미륵불에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떠났다는 자책감에 젖어 들었다. 나는 기자 시절 익힌 감각이 발동하였다. 금산사 미륵불상을 세운 진표율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도전』에는 「미륵불의 동방 조선 강세의 길을 연 진표 대성사」라는 제목으로 진표율사에 대한 행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놓았다.

동방 조선 땅의 도솔천 천주님 신앙은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영글어 민중 신앙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

진표는 12세 때 부모의 출가 허락을 받고 김제(金堤) 금산사(金山寺)의 숭제법사(崇濟法師)로부터 사미계(沙彌戒)를 받으니라.

법사가 진표에게 가르쳐 말하기를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님 앞으로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하여 친히 미륵님의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 하매 이로부터 진표가 미륵님에게 직접 법을 구하여 대도를 펴리라는 큰 뜻을 품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더니

27세 되는 경자(庚子, 760)년 신라 경덕왕 19년에 전북 부안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 들어가 미륵불상 앞에서 일심으로 계법을 구하니라.

그러나 3년의 세월이 흘러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하자 죽을 결심으로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니 그 순간 번갯빛처럼 나타난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살며시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놓고 사라지더라.
이에 큰 용기를 얻어 서원을 세우고 21일을 기약하여 생사를 걸고 더욱 분발하니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온몸을 돌로 두들기며 간절히 참회하매 3일 만에 손과 팔이 부러져 떨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거늘 7일째 되던 날 밤 지장보살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며 와서 진표를 가호하니 곧 회복되니라.

21일 공부를 마치던 날 천안(天眼)이 열리어 미륵불께서 수많은 도솔천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대광명 속에서 오시는 모습을 보니라.

미륵불께서 진표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시기를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戒)를 구하다니.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 참회하는구나. 내가 한 손가락을 튕겨 수미산(須彌山)을 무너뜨릴 수 있으나 네 마음은 불퇴전(不退轉)이로다.” 하고 찬탄하시니라.

이 때 미륵불께서 점찰경(占察經) 두 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를 진표에게 내려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것으로써 법을 세상에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으로 삼으라. 이 뒤에 너는 이 몸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도솔천에 태어나리라.” 하시고 하늘로 사라지시니라.

원각(圓覺) 대도통을 한 뒤, 닥쳐올 천지 대개벽의 환란을 내다본 진표 대성사(大聖師)는 온 우주의 구원의 부처이신 미륵천주께서 동방의 이 땅에 강세해 주실 것을 지극정성으로 기원하니 이로부터 ‘밑 없는 시루를 걸어 놓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고 4년에 걸쳐 금산사에 미륵전을 완공하니라.

이 뒤에 진표는 미륵불의 삼회설법의 구원 정신을 받들어 모악산 금산사를 제1도장, 금강산 발연사를 제2도장, 속리산 길상사를 제3도장으로 정하고 용화도장을 열어 미륵존불의 용화세계에 태어나기 위해 십선업(十善業)을 행하라는 미륵신앙의 기틀을 다지고 천상 도솔천으로 올라가니라.(증산도 도전 1:7:1-19)

미륵전에는 마침 찾아오는 불자도 없어서, 한참 동안 말없이 미륵불을 올려다보던 나는 와르르 무너지듯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도전』을 읽었던 그때부터 나는 과거의 포로가 되었다. 내 십 대 시절을 오롯이 하였던 금산사와,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을, 그리고 진표율사를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춰 주었다. 당신들을 몰랐다는 것은 곧 나를 몰랐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금산사에서 보낸 내 십 대 시절은, 행자 시절은, 사미 시절은 무엇인가. 『금강경』에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는 문구가 있다. 꿈이나 환영,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다는 의미다. 그런가! 그런가! 그때부터 내 머리는 복잡해졌다. 『금강경』에서의 그 온전한 문장의 가르침은 내 입장과 달랐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현상계의 모든 법은 꿈이나 환영,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니라.

부처님은 그렇게 설하셨다. 죄송하지만, 나는 금산사 미륵전에서 보낸 내 행자 시절을, 사미 시절을 꿈이나 환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 있는 실체라는 것을 확인하게 위해서 이곳 금산사를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반개한 눈가에 힘을 주었다. 눈언저리가 파르르 떨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