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금산사 일주문
□고승열전 소설 천 년의 약속 [5]
제2장 출가
노가원 소설가(본지 발행인)
1
“이럇. 이랴 아―.”
왼손으로 갈기를 움켜쥔 채 오른손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모는 목소리가 청아하다. 달리는 동물은 말이라기보다는 당나귀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체구이다. 그러나 안장에 앉아있는 주인과 비교하면 그런대로 격이 맞았다. 온통 검은 털의 흑마이다. 작은 체구에도 흑마는 용맹스럽게 생겼다.
다각다각―.
흑마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짧은 다리로 아무리 달린다고 해도 속도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말 주인은 신이 났다.
늦가을 바람이 상쾌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다.
해는 중천에서 한참 기울었다.
“표야. 천천히 달려라. 조심해야지.”
훌쩍 큰 백마를 타고 달리는 아버지는 열한 살 아직 어린아이인 아들 진표가 말을 모는 것이 퍽 대견스럽지만 또한 걱정스러운 듯 눈을 떼지 못한다. 백마는 흑마에 비해 속력을 내어 달리지 않았으나 거의 같은 속도를 유지하였다. 백마가 한 걸음을 뛴다면 흑마는 서너 걸음을 뛰어야 속도가 맞을 정도였다. 뚜벅뚜벅 관절 부분을 꺾어 가면서 절도 있게 걸어가는 백마는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시다.
“괜찮아요. 아버지.”
진표는 갈기 잡은 손을 놓고 안장에 반듯하게 앉아서 고삐 줄을 빙글빙글 돌렸다.
“허어. 인석아. 조심해야지. 딴짓하다가 또.”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짓지 못한다. 진표가 처음 말을 탔을 때 낙마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표도 이미 눈치를 챈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때는 어렸을 때잖아요.”
“그럼. 지금은 컸느냐?”
“그럼요. 내가, 열한 살이라구요. 근데, 아버지. 저기 저 산이 엄뫼지요?”
“엄뫼지. 큰뫼라고도 하고.”
“큰뫼라고요!” 진표는 눈을 송아지 눈처럼 부릅떴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쁨의 표현이다.
모악산은 엄뫼라고도 불리고 큰뫼라고도 불렸다. 전하는 얘기로는 한자어로 쓸 때 엄뫼는 모악으로 바뀌었고, 큰뫼를 ‘큼’을 음역하여 ‘금金’로 하고 ‘뫼’는 의역하여 ‘산’으로 하여 금산金山이라 바뀌었다고 하였다. 엄뫼와 모악은 어머니 산이란 뜻이다. 산의 정상에 어머니가 어리니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으로 보이는 바위가 있어서 어머니 산이라는 뜻이 생겼다고 하였다.
“전에 어머니랑 금산사에도 갔었는데, 좀 작고 초라했어요. 너무 작아요.” 진표는 어린 시절 금산사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인석아. 부처님 도량이 크고 작고가 문제인 게냐.”
“그래도요. 금산사가 그대로 이름난 절인데, 아쉬워요.”
“허어. 그럼 이 다음에 네가 커서 불사 시주를 많이 하려무나. 큰 절로 불사를 해달라고 해.”
“그럴까요. 참, 금산사 스님께서도 잘 계시겠지요?”
“누구, 숭제崇濟 스님 말이냐?”
“예. 전에 어머니가 불공드리러 갔을 때 가서 뵙어요. 그때 뵈니까, 꼭 아버지 같으시던 걸요.”
“뭐야. 스님이 나 같았다고? 흠. 좋은 일이지. 그럼 좋고말고. 숭제스님이, 공부를 아주 많이 하신 분이니라. 자주 가서 뵙도록 해.”
“아버진. 나 혼자 절에를 어떻게 가요. 난 열한 살이라고요.”
“왜, 아니냐. 열한 살이면 다 컸다고 하지 않았느냐.”
“참. 그땐 그때고요. 그러지 말고 오늘 금산사에 가면 되겠네요.”
“안된다.”
“왜요? 아버지.”
“우린 지금 사냥 중이잖느냐. 부처님은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고 하셨느니.”
“알았어요. 아버지.”
진표는 이미 아버지의 얘기를 뒤로 하고 쏜살같이 말을 몰았다. 뒤에서 말고삐를 당기며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졌다. 아직 어리지만, 속내는 꽉 찼다는 든든함이 가슴에 차 올랐다.
“내마奈麻(乃末, 奈末, 柰麻) 나으리. 좀 천천히 가야써것는 디요. 소인들은 도저히 못따라가겄구만이라 잉.”
뒤따르는 세 명의 사내들이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중늙은이 한 명과 젊은 사내 그리고 진표 또래의 아이였다. 각자 등에 화살통 하나씩을 메고 있는 그들의 손에는 활과 화살이 들려 있는 몰이꾼들이었다.
내마는 신라의 11등급 관직명이다. 진내마는 진표의 아버지를 이름 대신 벼슬로 지칭하는 것이었다. 진내마 부자의 뒤를 따르는 몰이꾼들은 노비였다.
“알았느니.” 인근에서 인품이 좋기로 소문난 진내마였다. “표야. 게 섰거라.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지.”
“아버지. 저기, 사슴이에요. 저놈을 잡아야 돼요.”
진표는 대답 대신 사슴을 쫓았다. 제법 큰 사슴이다. 진내마도 욕심이 동했는가 보았다. 부자는 약속이나 한 듯 사슴을 쫓았다. 그러나 사슴은 이내 울창한 숲속으로 사라졌다.
“표야. 그만 됐다. 쉬어 가.”
아버지가 아쉬움을 감추고 말했다.
“예, 아버지. 그러잖아도, 쉬었다 갈 참이에요.”
진표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곳은 숲으로 둘러싸인 개울가였다. 잠시 후 몰이꾼들이 헐떡거리며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