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Unsplash의alex geerts...alex-geerts-_4CqNN233S0-unsplash
■박말임 수필
어른답다는 거
어른답다는 말은 나이를 뜻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 백발이 성성해지고 몸이 늙어감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른답다는 말은 나이가 아니라 삶의 태도로 증명된다.
현명한 행동을 하는 어른은 어떤 사람일까.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화가 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순간의 격정을 잠시 가라앉힐 수 있는 사람. 화를 내더라도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꺼내 놓을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른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릴 적 우리 외할아버지는 어른 팔 길이쯤 되는 곰방대에 담배를 꾹꾹 눌러 담아 피우셨다.
우리 형제는 할아버지 곰방대에 담배를 채워 드리고 성냥불을 켜서 곰방대에 붙여 드려야 했다.
할아버지는 오전 새참과 오후 새참 때마다 막걸리 반되, 그때는 '대포 한 잔'을 드셨다.
그 막걸리 주전자를 300미터 거리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배달하는 일은 손자들의 몫이었다.
여름날 하교해 단잠에 빠진 나를 엄마는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할아부지 술 때 기다리다가 화나 내려오면 너 곰방대로 후드려 맞는다. 퍼뜩 올라가거래이~!
엄마는 그 보상으로 내게는 아기 주먹만 한 '왕다마' 사탕을 입에 넣어 주셨다.
언덕배기 할머니 집 삽작(대문)에 들어서면 할아버지의 " 어험 어험"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는 꾸지람이었다.
행동이 조신한 외할머니가 차린 작은 상에는 술안주로 김치보시기, 나물 한 접시가 올라있고 하얀 사발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가 막걸리를 사발에 찰람찰람하게 따라 드리면 할아버지 목에 막걸리 넘어가는 소리가 쿨러덩 쿨러덩 마른 논 물꼬 트이는 소리를 냈다.
외할머니는 손자들이 술 심부름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다 아셨다. 그래서 할머니는 손자들에게 줄 간식으로 감자와 옥수수를 쪄 두고, 오이를 따서 준비해 두셨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가 더분데 올라오니라고 욕봤대이~!" 하시며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내 형제 7남매 중 한 사람도 할아버지 막걸리 배달을 안 한 사람은 없다.
외할아버지는 아들이 없다. 두 딸 중 장녀인 우리 엄마가 아들 노릇을 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어른이 돼서 생각해 보니, 엄마가 점방을 차린 것도 할아버지 막걸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점방이 없으면 막걸리 받으러 오리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산골마을에서 살았다.
점방을 하니, 매일 술 도가에서 통술이 배달되고, 땅에 묻은 술 항아리에 술이 가장 맛 좋은 때에 할아버지께 배달되었다.
그렇게 외할아버지가 84세로 돌아가실 때, 가족 모두가 방 안을 가득 채워 임종을 지켰다. 죽음이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다. 할아버지는 평화롭게 잠에 드셨을 뿐이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외할아버지를 ‘묵돌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음식을 많이 드시는 분도 아니고, 입맛이 까다로운 분이었다고만 기억한다.
외할머니는 할아버지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살았다. 할아버지 드실 음식 마련하고, 한복을 손수 만들어 풀 먹인 삼베옷을 인두로 다림질을 했다.
또한 손자들에게는 다정다감을 넘어서는 칭찬과 덕담으로 언제나 기쁨을 주셨다.
어른답다는 것은 결국 내 안의 욕망과 두려움을 스스로 다룰 줄 아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자세가 현명한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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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람을 안다는 것은 그것으로 이미 충만한 것이다.”
법정 스님 — 무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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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스스로 다스리는 사람, 부족함을 아는 것이 곧 어른다움과 맞닿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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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박말임은...
1995년 1월 월간『수필문학』으로 등단(필명 박진욱)하였다. 매사에 성실하고 부지런한 대한민국 수필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