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 러시아의 야망…"유럽에선 들러리 아시아에선 주인될 것"
러시아 동진정책 분석한 신간 '우리는 주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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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설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이타르타스=연합뉴스]
(기사발신지=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15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극동지방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약속하는 한편, 아시아 태평양국가들과의 '관계 강화'가 "러시아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2012년에는 극동지역 개발을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과제"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푸틴은 유럽연합(EU)의 동진을 신경 썼지만, 동시에 아시아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았다. 유럽에 대한 신경과 아시아에 대한 관심. 표트르 대제(1672~1725) 이래로 러시아의 관심은 "영원히 흔들리는 진자"처럼 유럽과 아시아를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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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 있는 표트르 대제 동상 [이타르타스=연합뉴스]
반도체 전쟁을 그린 '칩워'로 주목받은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교수가 쓴 신간 '우리는 주인이 될 것이다'(너머북스)는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사(史)를 조명한 책이다. '칩워'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전쟁의 핵심을 건드렸다면, 밀러의 신간은 부동항과 자원을 찾아 동쪽으로 향한 러시아인의 '욕망 서사'를 그린다. 또한 동쪽으로 향하려는 원심력과 유럽에 머무르려는 구심력 사이에서 우왕좌왕한 인물들의 이야기도 전한다.
러시아가 애초 동쪽을 향해간 이유는 상업적 이유, 즉 모피 때문이었다. 주요 수출품이었던 모피를 얻고자 러시아인들은 동으로 향했다. 남획으로 여우, 담비 등이 사라지자 그들은 새로운 포유류를 찾아 계속해서 동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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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 [연합뉴스 자료사진]
19세기 초 러시아 장군들과 장사꾼들은 베링해를 넘어 알래스카까지 진출했다. 그곳에서 얻은 해달, 물개 등의 가죽이 비싸게 팔려나가면서 '동진'은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문제는 긴 보급선이었다.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알래스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윤을 찾아, 혹은 땅을 정복했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 떠난 상인과 군인들은 영양부족과 추위, 그로 인해 촉발한 괴혈병에 시달리며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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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해군 [연합뉴스 자료사진]
러시아 해군은 영국이나 프랑스, 미군보다 약해 '바닷길'은 거의 막혀 있었고, 시베리아 철도 건설 전이라 육지를 통한 보급도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모피 무역을 독점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ussian-American Company·RAC) 측과 러시아 모험가들은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캘리포니아 지역과 태평양 하와이까지 진출하며 자체적인 보급을 시도했으나 미국·영국 등과의 충돌을 우려한 러시아 정부의 비협조 속에 이 같은 계획은 모두 좌초됐다. 나폴레옹 전쟁, 크림전쟁 등을 통해 국력이 쇠해진 러시아는 샌프란시스코 인근 지역 땅과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하면서 결국 아메리카 대륙에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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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에서 만난 트럼프와 푸틴 대통령 [EPA=연합뉴스]
아메리카 대륙에서 손을 뗀 러시아는 청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만주족의 근거지였던 아무르강과 우수리강 유역을 복속하고, 중앙아시아에 진출했으며 시베리아 철도와 만주 지역에 철도를 개설하는 등 동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척박한 시베리아 환경과 이로 인한 막대한 유지비용이 들면서 동방정책은 러시아의 경제적 부흥은 고사하고, 쇠락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과욕에 대한 결과는 러일전쟁 패배라는 최악의 참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러시아의 동진은 멈추지 않았다. 스탈린의 중국 내전 개입, 한국 전쟁, 고르바초프와 푸틴의 동방정책 등 대(對) 아시아 정책은 계속돼 왔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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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북스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저자는 러시아가 줄곧 아시아에 대한 야망이 컸다고 말한다. 이들의 야망은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인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도스토옙스키는 일기에서 "유럽에서 우리는 들러리이자 노예였지만, 아시아에서 우리는 주인이 될 것"이라고 썼다. 많은 러시아인이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생각을 지닌 채 동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결과가 좋았던 건 아니다. 러시아의 야망은 국가적 역량을 초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러시아인들은 부동항, 비옥한 농지, 광대한 아시아 시장, 정복할 수 있는 새로운 땅, 부와 영광을 찾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 중 실현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대개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대가를 치른 끝에 얻어졌다."
김남섭 옮김. 616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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