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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부경』과 『정역』의 연결 고리- 하도낙서의 順逆 논리

『천부경』과 『정역』을 꿰뚫는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하도낙서일 것이다. 김일부는 하도낙서에서 출발해서 하도낙서로 끝맺으면서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를 선포했던 것이다. 『정역』은 철두철미 선천과 후천의 관점으로 논지를 펼치고 있다. 그것도 후천을 먼저 말한 다음에 선천을 언급하는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특별히 지금은 낙서 선천이 하도 후천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하도낙서설과는 차별화시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도는 우주 창조의 설계도이며, 낙서는 인간 역사가 후천의 성숙한 세계를 향해 발전해 가는 성장 과정의 원리를 담고 있다.

김일부는 3극과 음양오행의 구조 안에서 우주는 선천과 후천의 두 얼굴로 구성되고, 지금은 낙서 선천에서 하도 후천으로 계절의 옷을 바꿔 입는 시간대라는 의미를 숨기고 있다. 9수 낙서가 선천이라면, 10수 하도는 후천인 셈이다. 10수 없는 낙서는 하도 세상을 갈망할 수밖에 없고, 지금은 선후천 교체의 막바지에 이르렀다[六十三 七十二 八十一, 一乎一夫]고 말한 것이다.

하도낙서는 선후천 변화라는 시간 질서의 전환 문제를 담고 있다. 그래서 김일부는 역의 본질은 시간의 해명에 있으며, ‘역은 캘린더 = 책력[易者曆也]’이라는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동양학의 주제를 완전히 바꾸었다. 따라서 「대역서」의 ‘위대한 변화(Great Change) = 위대한 열림(Great Opening)’의 의미도 『천부경』의 ‘일적십거’와 연관시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도낙서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은 『정역』의 선후천론으로 나타났다. 하도와 낙서를 과거에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자연의 ‘창窓(window)’으로만 알았다. 김일부는 선천이 후천으로 변화한다는 근거를 하도낙서에서 찾았다. 그래서 하도낙서는 하늘이 내려준 신령한 보물이라 표현한 것이다.

“하도와 낙서의 이치는 후천과 선천이요, 하늘과 땅이 가는 길은 기제와 미제이다.”

이 글에 정역사상의 전체 구도가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도낙서의 핵심은 선후천의 전환에 있다는 뜻이다. 과거의 하도낙서가 동양형 천지창조의 설계도라면, 김일부는 하도낙서를 천지의 재창조설로 인식하였다. 그러니까 과거의 하도낙서설만 고집하는 까막눈은 정역사상의 심층에 출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하도낙서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넘어서 천지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이 곧 하도낙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도낙서에 대한 커다란 사유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도와 낙서의 이치는 후천과 선천이다’라는 명제는 역학사를 통틀어 최초로 나온 선언이다. ①‘하도 = 후천’, ‘낙서 = 선천’라는 등식과, ② 후천을 먼저 말하고 선천을 뒤에 말하는 특유의 문법, ③ 하도낙서는 시간 위주의 사유이고, 괘효로 구성된 『주역』은 공간 위주의 사유라는 세 가지는 정역사상의 압권이다. 그러니까 하도낙서의 질서는 만물의 보편법칙을 너머 시공의 구성 근거로 존재한다는 시간의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왜 ‘하도=후천’, ‘낙서=선천’이며, 천지는 어떻게 미제괘와 기제괘로 설명할 수 있는가? 지금의 천지는 하도에 근거하여 낙서 방식으로 생성 진화하고 있으며, 앞으로 낙서를 거쳐 하도 세상으로 복귀한다는 전제에서 하도를 먼저 말했던 것이다.

천지가 걸어가는 길은 『주역』 세상이다. 왜냐하면 64괘는 건곤에서 시작하여 기제괘旣濟卦(䷾)를 거쳐 미제괘未濟卦(䷿)로 끝맺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이 과거 → 현재 → 미래로 흐른다는 낙서의 논리가 전제된 발언이다. 한마디로 『주역』의 괘상으로는 하도낙서의 방향성을 설명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니까 괘상이 하도낙서에 근거하듯이, 『주역』이 『정역』에 근거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낙서가 1에서 시작하여 10을 지향하는 선천 상극의 논리라면, 하도는 10에서 1로 나아가는 후천 상생의 논리인 것이다. 그러면 왜 천지가 움직이는 길을 선천 낙서의 기제와 미제라고 했는가? 그 근저에는 시간의 ‘쌍방향성’이 하도낙서의 본질이라는 것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도와 낙서는 생명의 숫자로 헤아릴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천부경』의 ‘일적십거’라는 명제 속에 이미 하도와 낙서의 이치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김일부는 하도낙서에 함축된 존재론과 인식론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제쳤다. 정역사상은 하도에 근거하여 낙서 선천의 천지가 형성되어 다시 하도로 복귀한다는 하늘의 섭리를 시간론, 우주론, 6갑론, 음양오행, 도수론, 금화교역론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풀어냈다. 『정역』은 시간의 구조를 파헤친 천상의 학문이고, 『주역』은 천상을 모방한 지상의 학문이라는 뜻이다. 왜 이런 역설이 생길까? 하도낙서를 『주역』의 해석에서 원천 배제시킨 이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태까지 『주역』이 천상의 학문이라고 알았던 믿음에 찬물을 끼얹는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구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