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는 국민 통제받지 않는 권력…"민주주의의 큰 결함"
정병설 서울대 교수가 쓴 신간 '시민 없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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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검(왼쪽)과 중앙지법(오른쪽) 청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송광호 기자 = 200여년 전 미국의 민주주의를 고찰한 알렉시스 토크빌은 한 사회의 실질적인 주인은 재판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면 누가 판결하는지 보면 된다는 말이다. 고금의 사례를 봐도 실제로 그랬다. 조선왕조에서 왕의 권력은 법을 만들고, 그에 따라 재판하는 데에서 나왔다. 드라마로 친숙한 실존 인물 판관 포청천이 죄인을 앞에 두고 '작두를 대령하라'고 포효할 수 있었던 이유도, '춘향전'에서 남원 부사 변학도가 수청을 거절하는 춘향을 옥에 가둘 수 있었던 이유도, 모두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신간 '시민 없는 민주주의'(문학동네)에서 국민주권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에서, 선출 권력도 아닌 판사들이 이처럼 막대한 재판 권력을 별다른 통제 없이 독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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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재판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책에 따르면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는 모두에게 개방된 경쟁, 대개 공정한 선거로 권력을 차지할 사람을 정한다는 규칙이 지켜지는 걸 '최소한의 민주주의'라고 했다. 그러나 입법·행정부와 함께 권력의 한축을 담당하는 사법부에서는 선거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가령,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파면, 정당 해산권, 위헌법률 심판, 국가 기관 간 권한쟁의 심판 등 강력한 권한을 지닌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은 선출 권력이 아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처럼 선출된 대리인이 다시 대리인(헌법재판관)에게 시민의 권리를 위임하거나, 대법원장처럼 대리인(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대리인(대법원장)이 다시 대리인(헌법재판관)에게 권리를 위임하는 것이다.

저자는 "과연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이렇게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는 자가 다시 권리를 위임해도 될 정도로 비중이 작은 자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한국 헌법은 헌법재판소를 통해 국민주권설을 부정하고 있다. 시민이 가져야 할 권한을 헌법재판소에 모조리 맡기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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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대법원 [AFP=연합뉴스]

반면, 영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의 경우 여러 최고 권력자에 대한 탄핵권을 의회가 지니고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들 국가에선 최고 권력자에 대한 탄핵 작업을 하원에서 소추하고, 상원에서 심판한다.

헌법재판관에 대해선 '위임의 위임'이라는 절차라도 있지만 일반 판사들은 그마저도 없다. 오로지 시험만 잘 보면 된다. 사법 시험이나 변호사 시험만 통과해 법관 자격을 얻으면 '포청천의 권력'을 꿰찰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사법 영역에서는 전혀 선거가 이뤄지지 않는다. 시민이 사법적 판단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점에서, 사법 영역에서는 시민의 주권이 없는 셈이고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큰 결함"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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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저자는 최소한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처럼 국민들이 재판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식적인 국내의 '국민참여재판'이 아닌 영국과 미국처럼 시민들이 배심원단으로 참여해 재판권의 일부를 행사하는 '배심원제', 또는 독일·일본·대만처럼 시민법관이 전문법관과 함께 재판에 참여하는 '참심원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재판권이 없는 시민은 지배자라 할 수 없고, 시민이 지배자가 아닌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없다"고 강조한다.

264쪽.

buff27@yna.co.kr

(끝)(기사발신지=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