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악산 직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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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로 들어가는 길은 단순한 산길이 아니다. 소백산맥이 남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오다가 추풍령에서 한 번 숨을 고르고, 다시 서남으로 웅장한 능선을 그리며 달려와 힘차게 솟구친 황악산 자락, 그 동남 사면에 한반도 삼도(경상·충청·전라)가 맞닿는 길상지지가 펼쳐진다. 이 천연의 품 안에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황악산 직지사가 정좌하고 있다. 1,111m 비로봉에서 내려다보면 삼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한가운데에 대웅전 마당의 두 삼층석탑과 법당 지붕이 고요히 자리한다. 해동의 중심부에 자리한 으뜸 가람이라는 뜻의 ‘동국제일가람’이라는 별칭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과 사천왕문을 차례로 통과하면, 산사가 가진 특유의 고요와 도시 생활의 속도가 눈에 띄게 갈라진다. 대양문을 지나 시야가 열리는 순간, 정면에 대웅전과 그 앞을 지키는 쌍탑이 나타난다.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웅전은 정면으로는 단정하고, 지붕과 공포의 선은 유려하다. 전각 내부 수미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고, 뒤편으로는 18세기 후반에 조성된 삼존불 후불탱이 장엄하게 걸려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참배객과 수행자들이 이 자리에서 절을 올리고 기원을 올렸을 것이다.

황악산 직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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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이 도량이 단지 한 지방 사찰이 아니라 한국불교사 전체의 굵은 줄기와 함께 호흡해 온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전승에 따르면 418년 신라 눌지왕 2년, 고구려의 고승 아도 화상이 구미 도리사와 함께 이곳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직지’라는 이름이 생긴 연유도 흥미롭다. 아도가 도리사를 세운 뒤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에도 큰 절이 설 자리”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라 하였다는 설, 고려 초 능여 화상이 절터를 측량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땅을 재며 가리켰다는 설, 더 나아가 선종의 간명한 표어인 ‘직지인심 견성성불’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함께 전한다. 어느 설을 취하든, 이 사찰의 이름이 곧 불교 본연의 뜻, 즉 곧장 마음을 가리켜 본성을 보게 한다는 가르침을 품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 경순왕 때 천묵 대사가 중창하고, 고려 태조 왕건과 인연을 맺으며 직지사의 사격은 한층 높아졌다. 능여 대사는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태조를 도와 승리를 거두도록 도운 인연으로 이곳에 대가람을 하사받았고, 이때 직지사 대장전에 봉안되었던 금자대장경 593함의 기록이 금석문으로 남아 있다. 해장당에 봉안되었던 이 금자사경은 오늘 전해지는 고려 대장경보다 이른 시기의 작업으로 추정되어, 직지사가 대장경 신앙과 경판 조성의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 직지사는 또 다른 역사적 전환점과 만난다. 정종의 태실이 절 북쪽 언덕에 봉안되면서 왕실과의 인연이 깊어졌고,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학조 대사, 그리고 임진왜란의 승병장 사명대사 유정이 이곳에서 출가하며 사세는 더욱 크게 떨쳤다. 사명대사는 왜란기에 승병을 이끌고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고, 이후 외교 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포로 송환과 강화 교섭에 힘썼다. 사찰 경내 한켠의 사명각에는 이 승병장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오늘의 순례객에게도 출가 수행과 애국 호국이 결코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임진왜란 중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 사라지는 큰 시련을 겪었지만, 이후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장장 70여 년에 걸친 대대적인 중건으로 직지사는 다시금 동국제일도량의 면모를 되찾는다. 8전 3각 12당 3장 4문, 정실만 300여 칸에 이르렀던 기록은 한 시대 직지사의 위세와 수행 인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직지사 사적비와 추담대사비 등 여러 비석은 이러한 역사와 법맥을 오늘까지 전해주는 귀중한 증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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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를 둘러보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비로전, 극락전, 응진전, 관음전, 명부전, 설법전, 만덕전, 조사전 등 전각들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다. 비로전은 ‘천불전’이라는 또 다른 이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불상이 봉안되어 있어 장엄한 광경을 이룬다. 이 가운데 경주의 옥석으로 조성된 천불상과 통일신라 조각 양식을 전해주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직지사 성보의 백미로 꼽힌다. 대웅전 앞, 비로전 앞, 청풍료 앞에 세워진 여러 삼층석탑 또한 시대와 출처는 다르지만 하나의 도량 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어, 순례객에게는 살아 있는 야외 박물관과 같은 인상을 준다. 청풍료는 현재 성보박물관으로 활용되어 직지사가 지닌 다양한 불화와 불상, 공예품을 상시 전시하고 있다.

직지사의 현재는 ‘템플스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활짝 열려 있다. 만덕전과 설법전은 단지 대형 법회장이나 연수원이 아니라, 시민과 청소년, 외국인들이 사찰의 일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중에는 휴식형 템플스테이로 고요한 산사의 하루를 보내는 이들이, 방학철에는 어린이·청소년 산사체험과 영어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도량을 채운다. 수행형 프로그램에서는 예불과 참선, 발우공양을 통해 현대인들이 일상의 소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직지인심’이라는 사명은 이제 출가 수행승에게만이 아니라, 도시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셈이다.

사찰 뒤편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황악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비로봉에 서면 백두대간의 능선이 파도처럼 겹쳐지고, 직지사 마당과 김천 시내, 그리고 멀리 삼도의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능여계곡과 운수계곡, 내원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와 기암괴석, 멱원대와 법수천의 약수는 이 도량이 왜 예로부터 길상지지로 전해져 왔는지 몸으로 체감하게 한다. 산내 암자인 운수암과 백련암, 명적암 등은 번잡한 경내에서 한 걸음 더 물러난 참선과 묵조의 공간으로, 지금도 수행자들의 숨결이 이어지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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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밖으로 나오면 사명대사 공원과 평화의 탑, 그리고 최근 김천김밥축제 등 지역 문화행사가 어우러진 새로운 관광·문화 벨트가 펼쳐진다. 오래된 산사와 현대 도시, 수행과 관광, 호국의 기억과 평화의 염원이 이 일대에서 서로 겹친다. 그러므로 직지사 순례는 단순히 한 사찰을 둘러보는 여행이 아니라, 삼국시대 아도 화상에서 고려의 능여, 조선의 사명대사, 그리고 오늘 템플스테이로 이어지는 한국불교 1,600년의 흐름을 한 자리에서 만나는 시간이다.

황악산 자락을 내려오며 발걸음을 돌이켜 보면, 이 도량이 걸어온 길은 한 개인의 생애와도 닮아 있다. 창건과 중창, 전란과 소실, 중흥과 확장, 그리고 일상의 수행과 치열한 역사 참여가 뒤엉킨 한편의 장편 서사. 직지사의 직지(直指)는 결국 먼 역사를 관통해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 많은 이야기와 유산을 바라보는 당신의 지금 이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순례의 마지막은 그 질문 앞에 잠시 서서, 자신의 마음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가리켜 보는 조용한 성찰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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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황학산 직지사 순례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 성불하세요~~

박정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