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길 너머 길
황희순
언양의 문필봉 아래 정토마을, 염불을 들으며 죽비소리에 맞춰 백팔배를 하고 있었다. 난생처음이라서 앞 사람을 보며 자세를 따라 했다. 육십여 명 중 이름 불릴 때까지였으니 108이라는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십 번 정도 했을 무렵부터 4~5분 간격으로 한 명씩 부르기 시작했다. 요가를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안 해본 자세라선지 허벅지가 뻐근했다. 그래도 죽음을 연습하러 왔으니 어떤 술수도 생각하면 안 될 터였다.
교육생 중 반 이상 불려 나갈 때까지 차례가 오지 않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시작하여 한밤중이 되었으니 띄엄띄엄 빼먹으며 비틀비틀 절을 했더라도 백팔배를 두 세트는 했을 것이다. 대여섯 명 남았을 즈음 내 이름을 불렀다. 걸어가려 했으나 걸음이 걸어지질 않아 할 수 없이 엉금엉금 출구를 향해 기어갔다. 안에 입은 청바지 탓에 수의(壽衣)라고 입은 무명치마는 무릎에 칭칭 감기고 저고리는 풀어헤쳐져 엉망이 되었다. 간신히 일어나 치마저고리를 고쳐 입고 문을 열자 칠흑의 어둠과 찬바람이 우르르 나를 덮쳤다.
문밖엔 철재 계단이 있고 저승사자로 분장한 도우미 둘이 흐린 불빛 아래에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굴러떨어질 것 같아 난간을 붙잡고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갔으나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다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깜짝 놀란 그들이 나를 부축하며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죽은 자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가 할 수 있겠냐고 묻다니, 똑바로 서지도 못하면서 웃음이 푹 터졌다. 수의까지 입었는데 살려줄래요? 농담 한마디 던지고는 그들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 허벅지에 쇳덩이를 달아놓은 듯 발바닥이 땅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이승을 떠나기 싫은 죽은 자가 저승사자 앞에서 엄살 피우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저승사자 손에 질질 끌려 임사체험장(臨死體驗場)이 있는 산밑까지 갔다. 그들이 할 수 있겠냐고 또 물었다. 안 하던 절 때문이라고, 할 수 없어도 할 거라고 변명하며 다짐했다. 치맛자락을 둘둘 말아 허리춤에 홀쳐매고 나는 약간 경사진 어둑어둑한 언덕배기를 네발짐승처럼 기어 올라갔다. 둔하던 다리가 조금씩 풀렸다. 꼿꼿이 서서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숲 사이로 보이는 불빛과 염불 소리를 향해 다리를 힘껏 세워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곳엔 몇몇 도우미와 염불하는 스님이 교육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우미의 안내에 따라 몇 가지 설명을 듣고 관에 들어가 누웠다. 양어깨가 움직이지 못할 만큼 딱 맞았다. 염습할 때 꽁꽁 묶고 또 묶어 혹시 깨어나더라도 돌아누울 수 없도록, 그리하여 이승에 미련 두지 말고 고요해지라고 여백 없이 관을 만든 모양이다. 엉뚱한 상상을 하는 사이 관 뚜껑이 쿵 닫히고 못 박는 소리가 천둥 치듯 들렸다. 그리고 암흑이었다. 폐소공포증이 꿈틀거려 눈을 감았다. 도우미가 관 가까이 대고, 하관(下棺) 후 문제가 생기면 본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말하라고 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터, 죽음이 그러하듯 호홀지간(毫忽之間)에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
염불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삼라만상이 정지되었다. 한 백 년 전 묻힌 이처럼 무덤 속에서 숨을 죽이고 누워있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시간을 가늠할 순 없지만 5분여 지난 후 땅 위로 올려졌다. 도우미가 관뚜껑을 벌컥 열었다. 육신은 땅속에 두고 구만리 저승길을 걸어 정토까지 가야 하는 숙제를 받았다. 그 길에 해찰하는 교육생을 만나더라도 묵언하라고 했다. 몸을 잃었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뜻밖의 상황극에 몰입하려고 나는 내게 최면을 걸었다.
목탁 소리 아득히 들리는 산속 오솔길엔 희미한 불빛이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전생을 비춰보라는 듯 전신거울이 있었다. 거울 앞에 섰다. 무명 치마저고리에 거지꼴을 한 저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대자연 속 한 점인 나를 찬찬히 구경했다. 어느 지점에선 흉측하게 분장한 이가 툭 튀어나와 길 아닌 숲으로 가자 하고, 괴성이나 노랫소리나 번쩍이는 불빛 등이 정신을 흐트러뜨리며 정토 가는 길을 훼방했다.
훼방꾼들 사라진 둔덕 위 환한 불빛 아래에 똑같이 생긴 업(業) 보따리가 쌓여있었다. 자신의 업을 고를 수 없듯 이것저것 고르면 절대 안 되고 단번에 집어 들고 가라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 속삭이듯 말했다. 하나를 집어 들고 꼬불꼬불 적막한 저승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이런 길을 홀로 갔겠구나. 사고로 잃은 내 딸 수진이 생각났다. 십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느끼는 사이 목탁과 염불 어우러진 소리가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산자락 끄트머리쯤 환하게 불을 밝혀놓은 정자가 보였다. 정토였다. 파란만장한 일생이 끝난 것이었다. 어렵게 시작한 연극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숙소로 가기 위해 산길을 벗어나 논둑에 들어서니 비스듬히 기운 상현달과 업 보따리를 든 긴 그림자가 나를 자꾸 따라왔다. 걷다가 멈춰 달을 올려다보고 그림자를 돌아보기도 하며 살았나 죽었나 나는 나를 자꾸 의심했다. 산길 걷는 동안 정수리까지 고여있던 눈물이 발걸음 옮길 때마다 출렁출렁 흘러내렸다. 십 분은 걸었을 논둑길이 십 리나 되는 듯했다.
자정이 훌쩍 넘었을 시간, 모닥불 활활 타오르는 숙소 마당에 도착했다. 비구니와 교육생과 도우미 몇몇이 불무더기에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교육과정 뒷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이의 업 보따리에는 깨끗한 상자에 초콜릿이 들어 있었고, 벽돌이 두 개 들었던 어떤 이는 무거워 화를 내기도 했단다. 누구는 관 뚜껑을 닫자 비명을 질러 실패했고, 누구는 혼자 걷는 산길이 무서워 중간에 포기했고, 누구는 넘어져 발목을 다쳤고, 누구는 길을 잘못 들어 구렁에 빠졌다고 했다.
마당귀에는 교육생들이 입었던 무명 치마저고리와 업 보따리가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나도 수의라고 입었던 겉옷을 벗어놓고 들고 온 업 보따리도 그곳에 내려놓으며 슬쩍 풀어보니 붉은 벽돌이 하나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불교 호스피스교육 5박 6일 과정 마지막 밤이 달과 함께 고즈넉이 이울고 있었다.
에필로그
십오 년 전 1월 초순, 열심이던 출판·편집 일을 접고 전화기와 시계를 장롱 깊이 묻어두고 나를 유배시켜 놓았던 곳은 호스피스 교육장과 불치환자가 요양하고 있는 사찰이었다. 숙식을 함께한 육십여 명은 승려이거나 불교도였다. 일체 생명의 생성과 소멸을 생물학적 리듬으로 생각하는 나는 무종교인이다. 전생이나 내생이나 신을 믿지 않는다.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에 “인간의 무덤만이 신의 탄생장소”라고 했다. 종교의 발생을 죽음에 대한 공포로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포와 상관없이 종교와도 상관없이 아주 평온하게 그때 그곳에서 처음 접한 장례지도사의 강의와 임사체험과 임상실습과 유서쓰기 등 죽음을 상상하는 ‘생사(生死)의 장’에 심취해 있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도 눈 펑펑 오던 문필봉의 정취가 어젯밤 꾼 꿈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눈을 맞으며 도반이 남긴 깊은 발자국 따라 마당을 돌고 또 돌던 그 새벽, 처음으로 무념무상의 상태를 경험했다. 나의 무의식에 저장된 그 선물은 지금도 내 감각이나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모든 목숨은 언젠가 반드시 실제 임사에 이른다. 이제까지도 그러했듯 죽은 이를 사랑한 산 자의 상실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그 길이 내가 사랑했거나 나를 사랑한 모든 이에게 자연스럽게 인식되기를 소원한다.
---
■황희순黄姫順 시인 약력
충북 보은 출생. 199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수혈놀이』 외 4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