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배신의 DNA
공직에 입문하자마자 어떤 분이 나를 불러 일러준 말이 지금껏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세상 살다 발을 잘못 디뎌 벼랑에 떨어지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누구든 살기 위해 절벽의 바위틈이나 나무뿌리라도 잡고 매달려 몸부림친다.
그때 누군가 나타나 손을 잡아 절벽 위로 끌어 올려준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 사람이 나타나길 간절히 빌겠지만, 정작 빌어야 할 것은 손을 잡아줄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런 위기에 나타나 나를 발로 차 절벽 아래로 떨어뜨릴 사람이 나타나
지 않길 빌어야 한다.
열 사람이 나를 구해주려 해도 누군가 한 사람이 방해한다면 그 한 사람을 당해낼 수 없는 것
이 세상사이기 때문이다.
나를 도와줄 열 사람을 만드는 것보다 나를 망가뜨릴 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
다...
가슴에 새기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섬뜻했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은 남을 도운 것은 잘 기억하지만 남에게 해를 끼친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기억하
고 싶지 않다.
반면 도움받은 것은 쉽게 잊어도 해를 입은 것은 오래오래 잊지 못하는 법이다.
도움받았을 때는 감사와 감동의 파동으로 마음에 새겨지지만, 피해를 입었을 때는 고통의 충
격으로 마음의 상처로 남기 때문이다. 쉽게 잊혀지겠는가.
왜 저 사람이 나에게 해를 끼치는가 영문을 모를 때, 그는 나에게 해를 당한 것을 잊지 못하
는데 나는 잊었기 때문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준 도움의 질량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받은 도움의 무게가 크게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때 배신감이 느껴진다."
‘배신’이라는 말처럼 참담하고 실망스러운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주고 받은 이익과 손해에 대한 주관적 견적이 다른 것은 인간성이나 인품에 따른 것이기도 하
지만, 자신에게 이익을 준 사람에게 배은망덕하는 '배신'이라는 이율배반은 왜 생기는 것일까
요?
인간은 성악설처럼 본래부터 악한 존재일까요?
1976년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라는 책을 출판하여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습니다.
'신다윈이즘'라는 호평도 받았죠.
그는 인간은 자기복제를 위한 이기적 유전자로 구성된 기계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 책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기적”이라는 말과 “이타적”이라는 말을 정의해야 하는데, “이기
적”은 다른 이의 자원을 사용해서 나의 자기복제를 늘리는 행위고, 반대로 “이타적”은 나의
자원을 사용해서 다른 이의 자기복제를 늘리는 행위라고 합니다.
진화론의 자연도태설에 의하면 나의 자원이 감소하는 “이타적” 유전자는 결국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기적 유전자란, 자기복제에 특화되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기적 유전자가 강한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더 강하게 살아 남는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유전자의 특성에 의해 자기에게 해가 되는 것은 제거하고, 타인의 도움은 자기에게 유리
하도록 이용하는 속성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문득 우울해집니다.
저밖에 모르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소시오패스일수록 ‘선한 지도자입네’ 하며 세상에서 부와 권
력을 누리며 성공했다고 떵떵거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란 말인가요?
정녕 인간은 그렇게 이기적인 존재이기만 할까요?
이기적일수록 더 세상을 이기는 것이 인간의 숙명일까요?
리처드 도킨스는 역설적으로 인간이야말로 이기적 유전자를 극복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강조하
면서 자기를 희생할 줄 알고, 은혜에 보은하는 이성과 도덕적 존재임을 강조합니다만,
그러나 다시 역설적으로 보면, ‘배신자는 반드시 배신당한다’는 정의도 이기적 유전자론에 의
해 성립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배신당한 자는 그 트라우마를 잊지 못하고,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반드시 그 해악을 제거하려
할테니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業報: 카르마의 법칙: 행위는 반드시 결과로 이어진다)라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결코 종교적 가르침만이 아니며,
노자가 “天網恢恢(천망회회) 疎而不失(소이불실): 하늘의 그물은 넓디넓게 펼쳐져 성긴 듯 보
이지만, 그 무엇도 놓치는 일이 없다.”고 말한 것도 그저 도덕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이기적 유
전자론에 의하면 생물학적 근거가 있는 진리인 것처럼 보입니다.
“배신자는 반드시 배신당한다...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해악을 용서하지 못하는 정의가 구현된다...”
묘한 역설입니다.
만일 내가 입힌 손해는 더 과장되게 상대방에게 입력되고, 내가 준 도움은 더 과소하게 출력
된다면, 절벽 끝에서 열 사람의 구원자보다 한 사람의 복수자가 더 무섭다고 경고했던 처음의
그 사람의 말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인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깁니다.
짧다면, 짧은 인생 사는 동안 남에게 도움은 못 줄망정 손해를 끼치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
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길다면, 남에게 해를 끼치고 상처를 주면 언젠가 반드시 되돌아 온
다는 것을 명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무슨 직업을 가졌던 간에 말입니다.
- 세종특별자치시장 최민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