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파병되어 낯선 타국에서 낙오병이 되어버린 길패트릭 미군 상사는 적군이 득실대는 산속에 숨어 며칠을 굶었는지 모릅니다.
수염과 머리가 자랄 대로 자라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숲속에서 문득 나타나는 인기척.
그는 총부리를 들이대고 겁에 질린 상대방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린 소년. 까까머리 중학생이 부들부들 떨며 서 있었습니다.
학생은 공포심에 오금이 저려 떨렸지만 온 몸이 털에 덮힌 고릴라에게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안심하라는 듯 손짓하였습니다.
패트릭 상사는 소년의 선한 얼굴을 보고 배를 쓰다듬었습니다. 배고프다는 표시였습니다. 소년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습니다.
소년은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집에 있는 부엌에서 밥과 고추장을 퍼서 갖다 주었습니다.
패트릭 상사는 게 눈 감추듯 밥을 먹어 치웠습니다.
그리고 77일간.
소년은 숲속의 미군병사에게 인민군의 눈을 피해 몰래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1950년, 미 제24사단이 참전한 세종시 일대 개미고개(전의) 및 금강방어선(대평리) 전투는 1100여 명이 넘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한 교전이었습니다.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치르던 미육군 제24사단 소속 랠프 길패트릭 상사(당시 27세, 키190cm)는 영대리 뒷산 금병산 줄기에서 길을 잃고 낙오가 되었고, 당시 공주중학교 학생이었던 금남면의 임창수씨가 그를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와 이웃의 성하영 아저씨 부부와 함께 비밀리에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전투는 더욱 격렬해지고 인민군들이 숲속을 뒤지자, 이제는 그 미군을 집에 데려다 숨겼습니다. 미군을 집에 숨겨주는 일은 정말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한테 들킬 것 같아서 화장실도 못 가고 낮에는 대소변을 받아냈습니다. 어떤 날은 미군이 숨은 멍석 위에 인민군이 앉기도 하고, 얇은 창호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숨어 있기도 했습니다.
피 말리는 긴장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77일 후, 낙동강을 끝으로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북상을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0월 1일 미군이 대평리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미군을 동네 청년들과 호위하며 20리 길을 걸어가서 미군 부대에 인계해 주었습니다.
저 멀리서 미군 지프차가 달려오는데, 그 차가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려 끌어안고 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울었습니다.
북상하는 유엔군에게 미군병사를 인계하면서 임창수 학생은 길패트릭 상사에게 석별의 눈인사를 했으나 다시 만날 기약이라는 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른 1971년.
성하영씨가 작고하자, 임창수씨는 주한 미국대사관을 찾아 당시의 사연을 전했습니다.
미 대사관은 길패트릭 상사를 추적하여 1년 후인 1972년 드디어 두 사람은 편지를 나누며 재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의 편지를 끝으로 그들은 다시 연락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전했고 한국전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미군 랠프 길 패트릭 상사가 1975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길패트릭 상사의 여동생이 편지로 보내왔던 것입니다.
여동생은 편지에서 길패트릭 상사가 유언으로 자신의 유산을 한국에 있는 임창수씨에게 물려주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임창수씨는 슬프고 감동했지만, 유산은 길패트릭씨의 남아 있는 가족들한테 물려주라며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임창수씨는 해마다 6월 25일이 되면 길패트릭 상사를 생각하고 금병산 기슭에서 잠시동안 맺어졌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면서 그를 추모하곤 했습니다.
다시 5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2025년 6월 25일.
임창수씨는 아흔넷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뇌수술을 받아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눈빛은 형형하고 따스해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세종특별자치시장, 저는 6.25전쟁 75주년 기념식에서 임창수옹에게 75년 전 고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그 분의 전설 같은 공로에 보답하는 세종특별자치시장의 감사패를 전했습니다.
너무도 늦었습니다.
왜 이런 고귀한 분에게 감사패를 전하는데 75년이 걸려야 하는지,
왜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구해준 미국과 미군들에게, 또 생명을 걸고 그들을 도왔던 애국 시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데 그토록 무관심했던 것인지 죄스럽고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임창수 옹께서는 제 손을 잡고 꼭 받고 싶은 상이 세종시장 상이었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다고도 했습니다.
감격해하시는 그 분을 보고 제가 감격했습니다.
임창수 옹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군은 우리를 위해 이역만리 타국까지 공산화를 막기 위해 온 사람인데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일을 한 거죠.
결코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6·25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장병들 국민들이 일치단결하여 공산당을 막고 우리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는 몸이 노쇠해 참석은 못하지만 마음과 정신으로 힘을 보탤 겁니다”
그날은 금남면 임창수옹의 전설이 역사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추신;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려준 세종시의 문화해설사 임재한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임창수옹과 함께 길 패트릭 상사에게 함께 밥을 날라 주고, 1971년 작고하셨다는 고성하영씨 부부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역사의 기록에 남기고자 합니다.
- 세종특별자치시장 최민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