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단풍 아래 불혹의 사투…짝은 '절로' 맺어지지 않았다
'나는 절로' 40대 특집 가보니…달밤 적막 아래 절에서 '데이트'
"이제 직진해도 될까요" "오세요"…50:1 경쟁률 뚫고 커플 3쌍 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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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에서 산책하는 '나는 절로' 커플 [촬영 정지수 수습기자]
(기사발신지=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 "'나'는 절로에 와서 / '는'누난나 신이 났습니다 / '절'대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반쪽을 찾고 /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겠습니다."
토요일인 지난 15일 낮 충남 예산 덕숭산 자락의 고찰 수덕사. '남자 9호'가 '나는 절로' 4행시를 선보이자 조용하던 경내에 웃음이 터졌다.
남자 9호는 "40대의 체력을 보여주겠다"며 창살에 매달려 턱걸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내일은 혼자 가지 않을 것"이라며 짝을 찾기 위한 '사투'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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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참가자의 가방을 들어주며 수덕사로 향하는 남성 참가자 [촬영 정지수 수습기자]
이날 수덕사에 모인 남성 10명과 여성 10명은 모두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의 만남 주선 프로그램 '나는 절로' 40대 특집의 참가자들이다. 재단은 이번 행사의 참가 자격을 35∼49세로 제한했는데 모두 1천12명이 참가를 신청하며 합계 경쟁률이 50.6 대 1에 달했다.
이들의 사투는 아침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출발해 수덕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부터 이미 시작됐다. 어색함이 찰나라도 감돌지 않도록 참가자들은 옆자리 이성과 어떻게든 이야깃거리를 만들려 애썼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여자 1호는 귤을 한 아름 가져와 참가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숫기 없는 참가자들에게는 곧바로 '정신교육'이 들어갔다. "주무시면 어떡하느냐"는 진행자의 타박에 한 남성 참가자는 "여성분이 피곤하다고 하셔서…"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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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담을 나누는 '나는 절로' 참가자들 [촬영 정지수 수습기자]
수덕사에서 개회식 등을 마치고 이어진 '1:1 로테이션 차담'에서 서로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10분. "호감이 든다"며 거침없이 '직진'하는 남성이 있는가 하면, 지루해하는 여성의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속세의 재테크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이도 있었다.
20대의 사랑은 '열정'이요, 40대의 사랑은 '조화'라고 했던가. 참가자들은 서로에게 섣불리 다가가기보다 답답하리만큼 신중한 모습이었다. 간혹 말을 놓는 이들도 있었으나 한 차례 데이트를 마친 늦은 저녁까지도 내외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보통은 버스 안에서 첫인상이 결정되고 오후쯤이면 윤곽이 나왔다는데 이번 행사만큼은 여전히 안갯속이었다. 재단 관계자들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다소 난감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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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크리에이션을 즐기는 '나는 절로' 참가자들 [촬영 정지수 수습기자]
그러나 역사는 밤에 이뤄지는 것이었다. 레크리에이션과 1시간 동안의 야간 데이트까지 끝난 오후 10시, 진행자가 "내일 프로그램이 끝나면 더 이상 연락처를 교환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강행군 속 졸린 눈을 비비던 참가자들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하나둘 점찍어놨던 이성과 함께 달밤의 적막이 내려앉은 수덕사 경내를 걸었다.
자정이 다 돼서까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방으로 들어오는 남성들도 여럿 보였다. 불이 모두 꺼져 캄캄한 탓에 얼굴도 보이지 않는 검은 실루엣에서 저마다 후련함과 아쉬움이 비치는 듯했다.
여자 7호와 밤늦게까지 산책을 마친 남자 1호를 붙잡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느냐"고 물었다. 남자 1호는 "이상형과 반대인 남자의 모습을 솔직하면서도 재미있게 설명하더라"며 "그전에는 한 번도 이야기 나눠본 적이 없는데 밝고 긍정적인 모습에 관심이 간다"고 털어놨다.
누가 마흔을 유혹에 휩쓸리지 않는 '불혹'(不惑)이라고 했는가. 참가자들은 최종 선택을 앞두고 번민을 거듭하는 듯했다. "마음의 결정을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부분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한 여성 참가자는 기자에게 되레 "지금 다가가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상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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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타종을 하는 '나는 절로' 참가자들 [촬영 정지수 수습기자]
이튿날 아침 공양을 마친 참가자들이 최종 선택을 위해 모였다. 소감을 묻는 진행자의 질문에 남자 1호가 "계속 일어나고 앉을 때마다 힘들어서 의자가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레 말하자 웃음바다가 된 것도 잠시, 긴장된 분위기가 다시 이어졌다.
진행자가 서로 마음이 통한 '현커'(현실 커플) 3쌍을 호명하자 참가자들 사이에서 "아!" 하는 자그마한 탄식이 들려왔다. "언니, 한 턱 쏴야겠다"는 부러움 섞인 박수 소리가 경내를 가득 메웠다.
사랑의 화살표는 한 방향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재단 관계자는 "한 여성 참가자에게 3명이 투표했으나 정작 여성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해 성사되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결국 용기 있는 자들의 '마지막 승부수'가 통했다는 설명이다. 여자 7호와 성사된 남자 1호는 "어제 가장 늦게까지 대화했던 게 '변곡점'이었다"며 "최종 선택을 하겠다고 딱 이야기는 안 했는데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흐른 것 같다"고 했다.
앞서 '임전무퇴'를 다짐했던 남자 9호도 여자 3호와 맺어졌다. 여자 3호는 "사실 버스에 함께 앉고 식사도 같이했던 분이 다른 분이어서 얼떨떨하다"며 "어젯밤에 남자 9호가 '이제 직진해도 되겠느냐'고 묻기에 '오세요'라고 답했다"고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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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로'에서 '현실 커플'이 된 참가자들 [촬영 최원정]
짝을 찾지 못한 이들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여자 1호가 "아쉬운 점이 너무 많다"며 잠시 생각을 고르더니 말을 이어갔다. 첫 데이트 상대로 가장 먼저 남성의 선택을 받았던 그녀였다.
"'타인을 통해 나를 돌아본다'는 말이 왜 있는지 알겠어요. 제가 너무 우유부단해서 쟁취하지 못한 게 마음에 남아요. 이번 기회를 통해 진짜 많이 배우고 성장했어요. 그동안 너무 수동적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이제는 적극적으로 살아보고 싶어요."
해사한 웃음을 짓는 여자 1호 뒤로 샛노란 은행잎이 가을바람에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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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사진을 찍는 '나는 절로' 참가자들 [촬영 정지수 수습기자]
away77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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