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청백리 이후백의 시문·생애 집대성…청련집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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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신역 청련집 [태학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기사발신지=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조선 중기 이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지내며 높은 덕망으로 이름을 날린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1520∼1578)의 시문과 생애 기록을 집대성한 '신편신역 청련집'(태학사)이 출간됐다.

심경호 고려대 명예교수가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다.

심 교수는 기존 자료에서 발견됐던 누락과 중복을 바로잡고 추가로 확인한 시편과 문헌까지 포함해 새롭게 구성했다.

이후백은 연안이씨 가문의 명인으로, 천재적 문사이자 청백리로 이름을 남겼다.

경남 함양군 우암촌에서 출생해 9세에 양친을 여의고 백부의 집에서 자랐다.

글솜씨가 빼어나 구졸암 양희, 옥계 노진과 더불어 천령삼걸(天嶺三傑)로 불렸다.

27세에 사마시, 36세에 식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24년간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호남 암행어사를 지냈고, 대사간·이조판서·호조판서 등 굵직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51세 되던 1570년에는 승정원 도승지로 있으면서 '국조유선록서(國朝儒先錄序)'를 지어 선조(宣祖)에게 올렸다. 국조유선록은 선조의 명으로 조선 유학자의 저작을 모아 엮은 것으로, 조선 유학의 도통을 공식적으로 확립하는 매우 의미 있는 서적으로 평가된다.

이후백은 1573년 종계변무(宗系辨誣)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종계변무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혈통이 명나라 기록에 '고려 우왕의 신하인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조선이 명나라에 시정을 요구했던 사건이다.

이후백은 명나라 법전인 '대명회전'에 잘못 기록된 태조의 가계를 수정한 공적으로 사후에 국가적 과업을 완수한 공신으로 등록됐다.

1574년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다음 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함경도의 궁핍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관아의 비용을 줄이고 부세를 감면했으며, 훗날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이런 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이후백은 59세가 되던 해인 1578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실록의 사관은 이후백을 평할 때 "총명하여 시에 능하고 옛글에 널리 통했다", "재주가 넉넉하고 문장을 잘했으며 흔들리지 않고 정도를 지켰다", "글은 꾸밈을 좋아하지 않았고 벼슬에 임해서는 직분을 다했다"고 기록했다.

이번 청련집은 이철진 연안이씨청련공파종중 회장과 종친회의 노력으로 완결됐다.

이철진 회장은 "청련집 간행은 한 문중의 기념사업이 아니라, 조선 중기 지성사의 결락을 바로잡고 시대의 윤리적 기준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라며 "청백리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오늘의 공직사회와 지식인의 책임을 되짚는 저작"이라고 소개했다.

kih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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