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미륵불


□한국 고승열전 소설 3

한국 미륵신앙의 중흥조 진표율사

천년의 약속

노가원(법명: 종상, 본지 발행인)

1. 화두

3.

정원사 황세운씨가 내게 먼저 책을 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고, 내가 그의 작업실에 찾아가서 책을 빌려왔다. 나는 연구실에서 담배를 물고 창밖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그 버릇 한 부분을 황세운씨가 가로채 갔다. 그는 내가 창밖으로 시선을 주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시간에 맞추어 자신도 휴식 시간을 가졌고, 그때마다 나무 밑이나 정원석 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몇 번씩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어느날 나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그의 휴게실로 찾아갔다.

“무슨 책을 그렇게 보세요?” 내가 물었다.

“뭐, 이것저것.” 내가 찾아온 것이 뜻밖이라는 듯 그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교수님같이 젊은 분이야 실감이 안 나겠지만, 늙으면, 급해지는 법이지요. 밀린 독서를 하는 중이랍니다.”

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

나는 말없이 휴게실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말이 휴게실이지 정원사 일에 필요한 도구들이 한 쪽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것이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정원사 일은 오래 하셨는가요?”

“운이 좋아서, 은퇴 후에 재취업을 한 게지요.”

“아.그렇군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휴게실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책을 찾는군요?”

백발에 온몸이 삭정이처럼 마른 그는 앙상한 손으로 캐비닛 속에 있는 제법 두툼한 책을 꺼내 주었다. 그의 손등에서 거머리 같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잠시 동안 그를 보던 나는 책으로 눈길을 가져갔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가죽 표지가 닳아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제법 두툼한 책이다.

“뭡니까. 아, 『증산도 도전』이군요.” 나는 3분의 1정도는 날아간 금박의 제목을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학생 때 일부 동학들이 신종교 단체인 증산도의 동아리 활동을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마침 내가 활동하고 있는 불교 동아리방과 이웃하고 있어서 이따금씩 그들의 활동을 엿볼 수가 있었다. 몇 번, 나도 그들의 모임에 참석한 경험이 있었다. 일반 동아리 활동과는 달리 그들은 매우 열심히 공부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진리’공부를 하였다. 지금도 인상에 남은 것은 ‘우주 1년’이라는 도표였다. 지구의 1년 사계절과 같이 우주에도 1년 사계절이 있다는, 그런 내용을 그린 도표였다. 대충 떠오르는 기억에 의하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대각선이 그러신 십자 중앙에 원을 그려놓았고, 네 방면의 십자 위에는 동서남북, 춘하추동, 생장염장(生長斂藏), 목화금수(木火金水)들을 각 묶음으로 적어 놓았고, 중앙 원에 토(土)라고 적혀 있었던 것 같다. 우주의 사 계절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리고 동북방과 서남방을 가로지르는 대각선의 오른쪽 아래는 선천(先天) 5만 년, 반대쪽은 후천(後天) 5만 년이라고 하였다. 대각선의 오른쪽은 선천개벽, 왼쪽은 후천개벽을 가리킨다. 그리고 지금은 우주의 가을이며, 후천 가을개벽을 앞둔 시기라는 얘기를 그들로부터 듣고, 나도 내내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있다. 우주 1년 도표를 두고, 그밖에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기억에 다 나지 않지만⋯.

“증산도 신도입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니지요.”

그의 대답은 이외로 단호했다.

“그럼?”

“나는, 모든 성인의 가르침을 존중합니다. 다 믿지요.”

“그렇군요.”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라고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게실 안은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자초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 저기 오래된 책은.” 내가 청소 도구함 위에 몇 권 얹혀 있는 책들 중에 한 권을 보고 물었다. 내 질문에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의도가 섞여 있었다.

“아. 저거요. 어디 보자.” 황씨는 꾸역 일어나 너덜너덜한 검은 표지의 책을 들고 왔다. “이건, 『대순전경』이라는 책인데.”

“『대순전경』이라구요.” 나는 황씨가 들고 있는 두 책을 번갈아 보았다.

“증산도 신도들이 신앙하는 증산 상제의 행적을 기록한, 경전이지요. 이 『대순전경』은 그 초기 기록이구.”

“….”

“초기 기록들은 『대순전경』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지요. 『도전』은 초기 기록들을, 다시 일일이 답사하고 관련자 후손들의 증언을 취재하여 다시 정리한 경전입니다. 일종의 종합경전이라고 할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증산 상제가 누구입니까? 증산도 신도들이 신앙한다면 증산도 도조인가요?” 물론 나도 대학생 때 증산도 동아리 동학이 맞추지기만 하면 인사말처럼 들려주던 증산 상제에 대해 대충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우주 1년 도표에서 대각선의 왼쪽 아래쪽, 후천 개벽기에 강세한다는 대우주 통치자를!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내가 아직 지식이 짧지만서도, 얘기하자면, 그분은 19세기 말, 그 나라 안팎으로 혼란한 시기에, 또한 우주사적으로는 우주의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기에 사람 농사를 결실하기 위해 인간으로 온 우주 주재자이자, 통치자입니다.”

“우주 주재자…통치자…라구요.” 나는 황씨가 했던 말을 뇌었다. “그렇군요. 우주의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기에 인간으로 온, 우주의 주재자라.”

“그 분을, 상제라고 하지요. 옥황상제!”

“옥황⋯, 상제! 와. 세군요!” 나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분은⋯, 미륵불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의 부처, 님⋯.”

황씨는 내가 한때 승려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미륵불에 힘을 주어 말했다. 황씨의 얘기대로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를 가리킨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이트레야(Maitreya)이며,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지타(Ajita, 아일다阿逸多)이다. 미륵은 자씨(慈氏)로 번역되어 흔히 자씨보살로도 불린다. 불전에 의하면 그는 인도의 바라나시국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현재 미륵보살로서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 그는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56억7천만 년이 되는 때에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할 것이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라고 하는데, 그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전까지는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이후는 미륵불이라 한다.

“미륵불이라구요, 미륵불!”

나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움푹 들어간 황씨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흔들리는 것은 내 마음이었다. 미륵불! 그것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내, 깊은 기억의 숲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사자를 깨우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나의 뇌리에는 금산사 미륵불이 번갯불처럼 스쳤다. 나의 도반 원명의 얼굴과 함께.

“교수님. 내 말이 아니랍니다. 증산상제, 당신이 직접 자신의 신원을 그렇게 밝혀 주었어요. 여기, 보세요.”

황씨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혀끝에 침을 묻힌 뒤에 『도전』을 재빠르게 넘겼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내가 미륵이니라.”(증산도 도전 2:6:5. 이하 편:장:절만 표기)라는 글자가 분명히 적혀 있었다. 붉은 볼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채.

“여기도…여기도요.”

황세운씨는 『도전』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지 곧장 그가 원하는 부분을 찾아내어 손가락 끝으로 꾹꾹 짚어 나갔다. 과연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도전』 곳곳에서 증산 상제(당신을 신앙하는 분들의 입장을 존중하여 ‘증산 상제’로 표기한다)는 자신이 미륵이라고 자기의 신원을 밝혀 놓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대숲에 몰아치는 바람처럼 내 의식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 것은, “금산 미륵은 붉은 여의주를 손에 들었으나 나는 입에 물었노라.”(3:320:9)라는 구절이었다. ‘금산’은 김제 모악산 금산사를 가리키는 것일 터이다. 오. 금산사 미륵전 미륵부처님! 나는 혼잣말로 뇌었다. 눈 앞에 황금빛 수미산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금산사 미륵부처님이 뿌옇게 피워 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