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greg-rakozy-oMpAz-DN-9I-unsplash
■석연경 시인의 시
은적사 종소리
석연경
고독이 고독을 넘어
겨울 강 건너 다다른 곳은
붉은 땅
달궈진 돌사자의 숨소리가
삭고 익은 미로의 지층 위에
마지막 겨울비로 내린다
흔적 없이 감춰진 길
별밤 정수리 숫구멍을 묵묵히 담은 호수 지나
고목 껍질에 햇살과 그늘이 이끼꽃 피우는
깊은 숲에 깃들어
후끈한 들숨과 날숨이
전생을 다독이고
후생을 피우다가
수만 년 용광로에서 한 호흡으로
쇳물 비로자나
쇳물 종
우는 듯 미소 짓는 듯
여기 이 순간
개봉숭아 꽃이 피고
돌배꽃이 피고 지고
밤하늘 별이 새벽 종소리로
불타오르며
스스로를 울린다
흔적 없는
은적사 저녁 종이
밝음과 어둠 사이를
뜨겁게 익히며
빈 들판을 울린다
■석연경 시인의 시
혈사경血寫經
석연경
지혈이 잘 안 되는
혀에서 피를 받아
혼이 썼다는 화엄경을
박물관에서 본 가을
활활 타오르는 조계산 자락을
먹먹한 마음으로 뚜벅뚜벅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길에
나는 보았네
이끼 낀 오래된 석축에
피로 새긴
꽃무릇 경전
누군가는 화두를 새기고
누군가는 불화를 피우고
익은 햇살 아래 타오르는
핏빛 화엄
■석연경 시인의 시
화엄사 괘불
석연경
물속처럼 투명하고도 깊은 밤
천오백 년 스쳐 지나간
사부대중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물결무늬 대방광불 화엄의 불빛이
경내를 감싼다
나무 사이를 떠다니는 화엄을
오늘은 명약이라 일컫는다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약을
쉽게 건네지는 못하던
자갈밭의 따뜻한 돌들
각황전에 묵묵히 앉은
고독의 꽈리
형형색색 고요한 절규다
검붉은 흙바람이
괘불의 얼굴을 스쳐도
괘불은 그저 투명한 잔물결로 바라볼 뿐
경내는 끊이지 않는 연기의 물소리가 흐른다
각황전 옆 푸르게 빛나는 여름 흑홍매는
아무 생각이 없다
성스러움의 끄트머리에서
어둠 속 멸도의 꽃이 선명하고
괘불에는 사람과 풍경이 겹쳐져
첫 새벽을 향해 잔잔히 일렁인다
■석연경 시인의 시
선암사 달마전 돌확에 어룽대는
석연경
어디서부터 왔는가
봄의 우듬지와 애채 키운 선암매
수백 년 매화 설법 그윽하니
심해의 뿌리그루에 앉아
묵언수행 중이던 승려 머리에
사운사운 매화꽃잎 흩날리네
이생은 매화향 가득한 봄날이라
선암사 경내 매화 독송 여여하고
차밭 뿌리 적셔준 단물 다르마가
칠전선원 달마전 돌확에 어룽댄다
중생의 아픔을 누가 아는가
내 아픔은 누가 아는가
돌확 물소리가 맑게 운다
민들레가 밟히면 천지가 울며
억수비 내리고
나비 날개 찢어지면 천지가 얼어
빙하기 되나니
고통을 고통이라 하여
어둠의 울림통이 되랴
슬픔을 슬픔이라 하여
생을 염하랴
고독을 고독이라 하여
절벽에 고산목으로 홀로 서랴
달마전 돌확 물소리 물소리 물소리
무엇을 축이려느냐
무엇을 씻으려느냐
모지거나 둥글거나
그저 층층이 내리는 물소리
돌탑도 돌담도 나무도 적멸에 들고
비로소 처음처럼 아무 것도 아닌 이 가을
고요하고 활활하니
겨울마저 웅숭깊으리
---
■석연경 시인 약력
·시인 문학평론가 1968년 밀양 출생
·시집 『독수리의 날들』, 『섬광, 쇄빙선』, 『푸른 벽을 세우다』, 『탕탕』, 『정원의 우주』가 있고 사찰시사진집 『둥근 거울』, 정원 시선집 『우주의 정원』, 힐링잠언시사진집 『숲길』, 시평론집 『생태시학의 변주』가 있으며 시산문사진집 『순천 정원 문화 산책』이 있다. 송수권시문학상 젊은시인상을 수상했으며 연경인문문화예술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