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세계기록유산] 작별하지 않을 기억, 동백꽃으로 피어나다
강요배 화백 작품이 시발점…동백꽃 배지에 유적지 동백꽃 문양
기억과 진상 규명 위한 노력…'화해와 상생을 통해 미래로'
(기사발신지=연합뉴스) 한승호 기자 = 유채꽃으로 유명한 제주에 '사계절 동백(冬柏)꽃'이 피고 있다.
'겨울 동'(冬)자가 들어가는 이름처럼 겨울에 피어 봄에 지는 동백꽃이 여름철 제주도 곳곳에서 방문객의 눈길을 끌었다. 꽃밭이 아니라 제주인들의 가슴에서 철을 가리지 않고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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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만들어 붙인'동백공방' (제주=연합뉴스) 한승호 기자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동백공방' 벽면에 만들어 붙인 동백꽃 2025.7.19 hsh@yna.co.kr
제주4·3 사건 기록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봉헌식을 계기로 17일부터 19일까지 '한국기자협회 제주4·3 팸투어' 활동을 위해 제주를 방문, 첫 번째로 찾은 제주시 삼도이동 관덕정에서 동백꽃을 처음 만났다.
관가 밀집지에 위치한 관덕정은 1947년 경찰의 3·1절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면서 4·3사건 발발의 도화선이 된 역사 속 현장이다.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드러났는데도 당국이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탄압에 나선 것이 당시 제주 주민들의 분노를 키웠다는 것이다.
팸투어 해설을 맡은 제주역사문화해설연구회 전영미 대표가 이런 사연을 소개했다. 현장 설명이 계속되는 동안 그가 입은 흰색 상의 왼쪽 가슴에는 동백꽃 코사지(꽃 장식)가 달려 있었다. '관광 제주'를 상징하는 유채꽃이 아닌 동백꽃이라서 더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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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유적지 표지판에 새겨진 동백꽃 문양 (연합뉴스DB)
이런 동백꽃은 제주에 산재한 관광지 틈바구니에 있는 4·3유적지 답사가 이어지며 계속 눈에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정공장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는데 4·3사건 와중에 한라산으로 도피했다가 하산해 집단으로 목숨을 잃은 주민들의 임시 수용시설로 사용되었다는 참담한 사연을 간직한 '주정공장 수용소 4·3역사관'에서 본 영상물에서도 동백꽃이 등장했다.
1949년 1월 조천읍 북촌리에서 자행됐던 학살사건의 희생자를 기리는 '너븐숭이 기념관'을 알리는 도로변 표지석이나, 11명의 주민이 땅속에 피신해 생활하다가 토벌대에 발각돼 한꺼번에 희생된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굴'로 들어가는 길목 입구 표지판에도 붉은 동백꽃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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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굴 입구 길목에 있는 표지판 (연합뉴스DB)
함덕해수욕장 부근에 있는 북촌리는 4·3사건 당시 남성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날벼락에 한꺼번에 학살의 희생자가 되면서 '무남촌'으로 불렸던 마을이다. 해마다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제주 동쪽 끝에 있는 유명 관광지 성산일출봉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인 터진목 언덕에도 '제주 4·3 성산읍희생자위령비'가 세워져 있었다.
인근 상가를 지나면서는 건물 앞에 동백꽃을 사람 키보다 크게 만들어 붙인 '동백공방'이 눈길을 끌었다. 동백꽃 무늬를 넣어 각종 기념품이나 소품을 만드는 곳으로 보였다.
동백꽃의 강렬한 붉은 꽃잎은 추운 겨울에 꿋꿋하게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려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하지만 한겨울 어느날 하얀 눈밭에 '툭'하고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지는 꽃이다.
전 해설사는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발생해 1954년 9월 21일까지 최소 2만5천명, 최대 3만명의 사망자를 낸 참혹한 역사"라며 "특히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라산 중산간마을을 대상으로 한 '초토화 작전'이 이뤄졌던 4개월간 희생자가 전체의 80%가량을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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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희생자 현황표 (연합뉴스DB)
군경의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948년 겨울 제주에는 이례적으로 많은 눈이 내려 온통 눈세상이 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 폭력 앞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라산 중산간으로 들어갔던 주민들은 폭설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마을로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학살 피해가 급증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마치 흰 눈 위로 동백꽃이 떨어지듯 눈이 쌓인 마을 곳곳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붉은 피를 흘리며 숨졌다. 아직도 정확한 진상과 피해규모 조사는 완결되지 않았다.
이런 참담한 역사를 알고 있는 제주 출신 강요배 화백은 4.3 연작 시리즈인 '동백꽃 지다_제주민중항쟁전'의 표지화와 작품을 통해 '피흘리는 동백꽃'으로 승화시켰다.
제주특별자치도는 2018년 4·3사건 70주년을 맞아 대규모 추모행사를 벌이며 동백꽃 배지를 만들어 보급했다. 동백꽃은 4.3사건의 상징꽃으로 자리잡으며 제주인들의 가슴에 새겨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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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세계의 기억으로' (제주=연합뉴스) 백나용 기자 = 18일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에서 4·3 영령에 4·3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음을 알리는 봉헌식이 열리고 있다. 2025.7.18 dragon.me@yna.co.kr
광주 5·18민주항쟁의 상징꽃은 이팝나무꽃이다. 1980년 당시 광주시민들이 주먹밥을 나누면서도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담아 상징꽃으로 삼고 있다.
6·25전쟁 당시인 1950년 6월 군경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4·3사건 관련자 등 수감 정치범과 보도연맹사건 관련자 등 민간인 4천~7천명을 숨지게 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상징은 산딸나무꽃이다.
다시는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할 슬픈 역사를 기억하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제주4·3사건 유족들은 18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 등재를 알리는 봉헌식에서 기억이 유지돼야 진상을 규명할 수 있고 화해와 상생을 통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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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진열대 곳곳에 한강 작품 (연합뉴스DB)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제주4·3사건을 세계인의 관심사로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서평에서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며 "죽은 이들을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 있다"고 적기도 했다.
h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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