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눈 피해 장독대 깊숙이…태극기와 함께 울고 웃은 역사(종합)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광복 80주년 '태극기, 함께해 온 나날들' 展
1900년 파리 박람회 출품 추정 옛 태극기, 국내서 실물 첫 공개
광제호 태극기·임시의정원 태극기 등 자료 210여 점 한자리에
X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것으로 추정하는 태극기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기사발신지=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태극기를 세우고 그 아래에 '대한임시정부 설립 기념 축하식 거행'이라 쓴 것을 적경이 발견하고 압수했다."
1920년 4월 18일 충남 강경에서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큰길가에 태극기를 걸고 임시정부와 관련한 문구를 내걸자 일본 경찰이 이를 압수한 것이다. 당시 일제는 태극기를 '구(舊) 한국기'로 부르며 금지하고 있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국한문으로 발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상해판'은 1920년 5월 15일 자 지면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X
국가등록문화유산 '독립신문 상해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나라를 빼앗긴 그때 태극기는 마음대로 걸 수도, 부를 수도 없는 존재였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태극기의 의미를 돌아보는 전시가 막을 올렸다. 국가적 상징을 넘어 우리 근현대사의 주요한 지점마다 함께해 온 역사를 되짚는 자리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서울 종로구 소재 박물관 3층 전시실에서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태극기, 함께해 온 나날들'을 8일 개막했다.
한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태극기와 함께 걸은 긴 여정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장면, 기억해야 할 마음을 되새기고자 기획한 전시"라고 소개했다.
X
광제호 태극기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8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태극기, 함께해 온 나날들' 특별전에 대한제국의 근대식 군함 광제호에 게양되었던 태극기가 전시돼 있다. 2025.8.8
전시장에서 다양한 태극기가 관람객 시선을 끌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강렬한 열망이 담긴 '독립'의 상징부터 히말라야 마칼루 정상에 꽂은 깃발까지 태극기와 관련 자료 210여 점을 모았다.
전시는 1945년 광복 직후의 희망을 노래하며 시작된다.
그해 12월에 펴낸 '해방기념시집' 속 김달진(1907∼1989)의 시 '아침'은 "집집마다 추녀 끝에 태극기가 나부낀다 / 거리마다 지축을 울리는 함성"이라고 노래한다.
X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출품 추정 태극기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8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태극기, 함께해 온 나날들' 특별전에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가 전시돼 있다. 2025.8.8
yes@yna.co.kr
박물관 측은 "태극기는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을 넘어 우리를 이어주고, 역사를 기억하게 하며, 마음을 모으게 해주는 '함께의 기호'"라고 설명했다.
125년 전 이역만리에서 세계인과 만났을 옛 태극기도 눈길을 끈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이 소장한 태극기는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에서 처음 소개됐다.
1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태극기는 1990년대 국립문화유산연구원(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이 해외의 한국 문화유산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존재가 파악됐다.
파리 중심가에 있는 국립기메동양박물관은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를 지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1853∼1922), 탐험가 샤를 바라(1842∼1893) 등이 한국에서 수집한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다.
X
파리 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을 소개한 프랑스 주간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를 기획한 이도원 학예연구사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었던 태극기로 추정된다"며 "오늘날과 달리 태극기의 4괘를 푸른색으로 칠했다"고 설명했다.
관람객들은 1900년 박람회 당시 '대한제국관'에 전시했던 향로,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가 기메박물관에 기증한 삼층탁자장과 함께 태극기를 볼 수 있다.
태극기에 담긴 저마다의 사연도 흥미롭다.
근대식 군함인 광제호(光濟號)에 게양됐던 '광제호 태극기'는 1910년 8월 29일 국권피탈을 하루 앞두고 함장인 신순성(1878∼1944)이 내린 뒤 남몰래 보관한 것이다.
X
태극기가 그려진 신축진찬도 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의 손자 신용석 씨는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의 당부로 태극기를 1년에 한 번씩 햇빛에 말리시며 소중하게 보존해 오셨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1908년 동덕여자의숙 개교 당시 교정에 걸렸던 태극기는 상자에 담아 장롱과 장독대 밑에 숨긴 덕분에 3·1운동 직후 일제의 수색을 피할 수 있었다.
대형 불화를 보관하는 상자 깊숙이 숨겨둔 전남 장성군 백양사의 태극기,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찍어내기 위해 쓴 것으로 알려진 목판 등도 공개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한 태극기 3점도 관람객을 맞이했다.
X
국가등록문화유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임시정부의 의회(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붕준(1888∼1950) 일가가 보관해 온 태극기는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정성껏 만들었다고 한다.
"이 태극기를 만들어서 우리나라 독립하고 다 한다고 그래서 아 좋다, 기쁘다 하면서 했어요." (1987년 김붕준의 아내 노영재 여사 생전 증언)
박물관 3층 전시실을 모두 활용한 특별전에서는 역사적 순간을 함께 한 여러 태극기를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주한 한인들이 정착한 '명동촌'에서 쓴 태극 문양 기와, 6·25전쟁에 참전하는 장병들이 조국 수호를 맹세하며 서명한 태극기 등을 선보였다.
X
다양한 태극기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광제호 태극기, 숭실학교 태극기, 마칼루 학술원정대 태극기, 대한인국민회 태극기. 순서대로 개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산악회, 독립기념관 소장 자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 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1953∼1982) 열사의 관을 덮은 태극기는 묵직한 울림을 준다.
1945년 열린 '해방경축종합경기대회'에서 태극기를 든 채 눈물 흘리는 손기정(1912∼2002) 선수를 포착한 사진 등 다양한 자료도 눈여겨볼 만하다.
한수 관장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세계인과 함께 살아가는 지금, 태극기에 담긴 기억을 나누며 우리가 지닌 힘과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16일까지.
X
'박관현 태극기'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8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태극기, 함께해 온 나날들' 특별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 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의 관을 덮은 태극기가 전시돼 있다. 2025.8.8
yes@yna.co.kr
yes@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