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사형 집행, 한미 관계 위협"…美 대통령 서한 초고 공개
국사편찬위, NARA 소장 기밀문서 확보…국무부 내부 논의도 담겨

DJ 재판 참관 보고서 '불공정성' 지적…"합법적 정치 활동" 명시

5·18 민주화운동 자료 포함…"무절제한 야만성과 대량 학살"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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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일본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 간행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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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군사재판 관련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기사발신지=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1980년 12월 6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의 손에는 서한이 들려 있었다.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이 쓴 친서였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을 만난 자리에서 미 국방장관이 한국을 잠시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한 뒤, '김대중의 사면'을 요청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그 속에는 사형 집행 가능성을 놓고 "미국 국민과 의회, 정부 안에서도 우려가 크다"는 내용과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경고와 우려가 포함됐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대통령 친서는 미국 내 많은 인사들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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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 당시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금으로부터 약 45년 전,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당시 상황과 미국 정부의 대응을 살펴볼 수 있는 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된다.

국사편찬위원회(이하 위원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를 맞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 기밀 해제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 문서를 18일 공개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1980년 신군부가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을 북한의 사주를 받아 5·18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1981년 대법원은 김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사형을 중단하라는 압박이 거세지자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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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카터 대통령의 서한 초고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후 김 전 대통령은 건강 악화를 이유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고, 미국으로 출국해 약 2년간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85년 귀국했다.

최근 기밀이 해제된 자료는 종이 상자로 2박스, 약 3천150장 분량에 달한다.

미 국무부 산하 인권 및 인도주의국에서 작성하거나 보관했으며 1980년 한국 주재 미국대사관이 국무부로 보낸 전문(電文), 내부 문건 등으로 구성돼 있다.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이 1980년 11월 10일 카터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이에 대한 카터 대통령의 답신 초안 등은 처음으로 그 내용이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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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카터에게 보내는 서한 1980년 11월 10일 작성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카터 대통령의 답신은 12월 6일 전달된 친서 초고로 추정된다.

위원회는 "카터 대통령은 이 편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사형 집행 여부가 한·미 관계의 기초를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라는 점을 경고했다"고 설명했다.

친서 전달을 놓고 내부적으로 논의가 뜨거웠던 정황도 엿볼 수 있다. 인권·인도주의국과 동아시아·태평양국이 일부 표현을 놓고 수정을 거듭한 흔적도 남아있다.

위원회 관계자는 "미국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 집행 방지를 외교 현안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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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부 법률고문실 작성 보고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미국 정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판 상황을 낱낱이 보고한 기록도 주목된다.

국무부 법률고문실이 1980년 12월 22일 작성한 보고서는 총 56쪽 분량으로, 체포 순간부터 재판에 이르는 과정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상세히 담았다.

재판 참관인으로 파견된 제프리 스미스는 1980년 8월 24일부터 9월 18일까지 약 한 달간 서울에 머물며 재판 과정을 직접 지켜봤고, 관계자들을 만나 인터뷰했다고 한다.

보고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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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진스키-김경원 회의록 1980년 11월 18일 백악관에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 국가안보 담당 대통령 특별 보좌관과 김경원 당시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이 만나 대화를 나눈 회의록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위원회는 "보고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활동이 계엄 해제와 자유선거 촉구 등 민주국가에서 처벌 대상이 될 수 없는 합법적 정치 활동이었다고 명시했다"고 전했다.

1980년 11월 18일 백악관에서 만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당시 미국 국가안보 담당 대통령 특별 보좌관과 김경원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의 회의록도 함께 공개된다.

브레진스키는 "김대중 사건의 결과는 범죄에 대한 판결이 아닌 정치적 판결로 인식돼 한국에 대한 국제적 평판이 심각하게 손상될 것"이라고 우려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한국 정부가 이 사건을 "'벼랑 끝 상황'(cliff hanger)으로 몰아가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며 조속한 해결과 조치를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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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일본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 간행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허동현 국사편찬위원장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료에 관해 "재판의 불공정성을 국제적으로 재확인하고, 한국 현대사 연구와 민주주의 가치 확산에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에 확보한 자료 중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내용도 포함됐다.

1980년 8월 일본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가 발행한 '광주에서 발생한 최근 사건에 관한 문서'는 같은 해 5월 19∼24일 광주에서 벌어진 사태를 직접 목격한 증언자의 기록을 중심으로 작성됐다.

보고서는 계엄군이 시민과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한 행위를 상세히 기록하며 "한국 군인들의 무절제한 야만성"에서 비롯된 "대량 학살과 암살"이라고 비판한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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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일본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 간행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번에 공개된 미국 문서들은 국사편찬위원회와 함께 한국의 현대사 사료를 발굴하는 작업에 매진해 온 연구자 윤미숙 씨의 노력이 컸다.

미국 내 기밀문서는 해제를 신청하고, 실제로 공개되기까지 수년 가까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종적으로 공개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윤씨는 "2022년 인권 및 인도주의국 관련 사료들이 창고에 잠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곧바로 기밀 해제를 신청했고, 3년 만에 해제돼 일반에 공개됐다"고 설명했다.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archiv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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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 간행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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