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칼럼] '전기·물·통신' 당연한 것이 끊겼을 때
이현정 한국수출입은행 대외협력기금(EDCF) 카이로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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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한국수출입은행 대외협력기금(EDCF) 카이로 소장 [이현정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우분투추진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AP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 9월 25일부터 이틀 동안 마다가스카르 수도 안타나나리보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수천 명의 청년이 거리로 나와 잦은 단전·단수 등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를 펼쳤다. 그 결과 Z세대(1990년대 중후반∼2000년대 초반생) 젊은이들이 중심이 된 시위는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 라조엘리나 마다가스카르 대통령을 탄핵했다. 한 달 전 네팔에서는 정부의 부패, 기득권층 자녀인 이른바 '네포 키즈'로 상징되는 세습에 분노한 시위가 벌어졌다. 네팔 정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금지 조치로 맞섰다가 시위 규모가 커지자 현지시간 9월 9일 결국 SNS 금지 조치를 철회했다. 이런 뉴스를 들으면 아프리카에서 단전·단수, 통신두절을 겪어 본 필자는 그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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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가스카르 시위 군중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아프리카 국가들은 단전·단수가 잦다. 다만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랜 기간 전기와 물이 끊기는지, 그리고 사전 안내가 됐는지, 안내대로 단전·단수가 됐는지 등 차이가 있다. 대체로 사전 안내가 없거나 안내와 달리 갑자기 단전돼 평상시 대비를 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24시간 끊김이 없이 후불제로 전기와 물을 써 왔던 필자는 탄자니아 주재원으로 처음 근무할 때 사전 안내 없이 언제라도 갑자기 전기나 물이 끊기는 단전·단수가 생소하게 다가왔다. 다행히 집을 임차할 때 비상 발전기와 물탱크가 있는 집을 얻어야 한다는 전임자의 조언 덕분에 필자가 머문 집들은 단전·단수가 발생해도 몇 분 이내 단지 내 비상 발전기가 작동했다. 물탱크의 물을 모두 사용하면 다음 물탱크가 있었기 때문에 단전·단수 시간은 길어야 한 시간 이내였다. 갑작스레 끊기는 전기나 물에 익숙해진 이후론 이러한 생활이 견딜 만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의 경우 특히 수도관이 집까지 연결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래서 마을 공동 수돗가에서 물을 사서 길어가거나, 집에 거대한 물탱크를 구비해 놓았을 경우에는 유료 급수차가 다닐 때 물탱크를 가득가득 채워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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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르네상스댐 송전소 [신화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주재원 시절 광케이블이 설치된 단지로 입주했다. 가끔 통신이 예고 없이 끊기거나 인터넷 속도가 갑자기 느려지는 상황이 있어도 한두시간 내 복구가 됐다. 이에 따라 일상생활은 크게 답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거의 경험할 수 없는 단전·단수·통신 두절의 고통을 한두 번씩 겪고 나면 다음 이사 갈 집을 구하는 첫 번째 조건은 안정적인 전기·물·통신 사용이 가능한지를 먼저 살피게 된다.
전기와 통신 인프라가 잘 갖춰졌어도 요금을 먼저 내야 하는 선불제가 기본적이다. 이에 따라 미터기의 잔량을 넉넉히 채웠는지 확인해야 한다. 상수(수도), 물은 임대인이 거대한 물통을 채워 놓는다. 이후 요금을 청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전기나 데이터 통신의 경우 임차인이 선불로 구매해야 한다. 그래서 주말 전, 잔량이 충분한지 확인해야 한다.
전기회사와 통신사가 주말에는 영업하지 않아 충전이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다. 주말 내내 전력 공급이 안 될 경우 냉장고 속 음식이 상하거나, 35℃ 이상의 더위 속에 잠을 설치거나, 통신이 두절돼 답답한 고통의 시간이 길어진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웃지 못할 경험담을 많이 듣게 된다. 탄자니아에서는 같은 단지, 맞은편 집에 살았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부소장의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그는 전기를 충분히 선불로 구매하고 한국으로 2주간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 복귀 후 집에 도착한 그는 에어컨, 전등이 작동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심지어 냉장고 속 음식은 모두 부패했다. 집 열쇠를 갖고 있던 청소 도우미가 에어컨을 최대 전력으로 틀고 에어컨 전원을 끄지 않고 나갔던 것이다.
필자가 살았던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이나 가나 수도 아크라의 경우 현지 고위직과 대사관, 국제기구 관계자 등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상황은 나은 편이다. 반면 지방 도시는 단전과 그 지속 시간이 수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주 발생했다. 아크라에서 만난 지방 거주 코이카 봉사단원들을 만나면 10시간 단전, 24시간 단전 시 견디는 노하우를 서로 주고받았다. 단전 시간이 유난히 길었던 한여름 밤을 견뎠던 어느 봉사단원은 땀띠가 나기 시작하자 수도로 피신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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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에스콤 석탄화력발전소와 송전선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지역 내 단전이 없더라도 우기에 쓰러진 전봇대를 복구하지 않아 오랜 시간 단전된 경우도 있다. 집 자체에 문제가 있어 전기가 끊기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탄자니아에서 처음으로 주재원 생활을 시작했을 때 당시 주탄자니아 한국 대사가 "아프리카는 평당 건축비가 한국의 10%도 안 되는 200만원 정도"라고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그런 가격이 책정된 것으로 짐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닥·벽·지붕 외관 등 기본골조만 갖춰 건축된 집이기 때문에 저렴한 건축비가 책정됐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에서 출장 온 건축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바닥 작업 하나에도 방수, 방충, 방열, 전기, 상·하수 등 여러 공정이 포함된 기초 작업을 꼼꼼히 진행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단지 바닥을 평평하게만 다진 뒤 시멘트를 바르고 벽은 블록을 쌓은 후 별다른 작업 없이 곧바로 미장에 들어간다. 그는 이런 단순한 공정 방식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쉽게 만든 바닥과 벽, 지붕은 살다 보면 문제를 온몸으로 겪어야 한다. 필자가 살던 아파트는 종종 갑작스러운 정전을 겪곤 했다. 두꺼비집을 열어 보면 차단기 스위치가 내려가 있었다. 스위치를 다시 올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전기가 들어왔다. 사람이 있을 때는 그나마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장기간 휴가나 출장을 갈 때면 냉동고 식품이 녹을까 걱정됐다. 그래서 아는 한국 사람에게 집 열쇠를 맡기고 일주일에 한 번씩 전기가 들어오는지 확인을 부탁하곤 했다.
필자는 그나마 제대로 된 건축물인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에 두꺼비집 내 차단기가 작동해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필자의 지인은 달랐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정원이 딸린 타운하우스로 입주했는데, 어느 날 과전류가 흘러 냉장고, 세탁기, TV 내 부품이 모두 타버렸다고 한다.
방수되지 않은 지붕에서 고인 빗물이 벽을 타고 스며들었고 피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전선에서는 누전이 일어날까 두려웠던 적도 많았다. 전기, 물, 통신, 중 하나라도 끊기면 복구가 늦어져 생활은 불편해지고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기도 했다.
아프리카 국가에서 단전, 단수, 통신 두절이 잦은 이유는 만성적으로 늘어나는 인구 대비 인프라가 부족한 점을 꼽을 수 있다. 또 발전소, 상·하수 시설, 통신 기간망을 구축해도 관리·유지·보수가 되지 않아 효율이나 성능이 점점 떨어지고 고장이 잦기 때문이다. 공급이 수요 대비 턱없이 부족해서 배분·할당을 해야 할 경우 서민들 주거지나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부분을 먼저 차단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서민들은 국가가 주는 기초생활보장이라는 것에 의문을 갖게 된다. 그 혜택을 소수 기득권층만 안정적으로 누리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된다.
가끔 탄자니아, 가나에서의 생활이 그립다. 그러나 단전·단수와 통신이 두절되었던 날들을 생각해 보면 그 하루를 내가 다시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 없기도 하다. 아프리카에서 서민들이 일상을 평화롭게, 안정적으로 누리는 때가 도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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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정 소장
현 한국수출입은행 EDCF(대외경제협력기금) 이집트 카이로 사무소장,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울대 글로벌 MBA, 세종대 국제개발협력학 석사, EDCF 탄자니아 사무소장(2017), 경협사업1부 팀장(2020), EDCF 아프리카부장(2021). EDCF 가나 사무소장(2022)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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