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콩쿠르 우승자' 에릭 루가 들려준 쇼팽의 순수한 서정
KBS교향악단과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협연…거장 슬레트킨 지휘
신디 맥티 작곡 '순환' 초연…선명한 대비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9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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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교향악단 제820회 정기연주회 (서울=연합뉴스) 박원희 기자 =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KBS교향악단의 제820회 정기연주회에서 에릭 루가 연주를 마친 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5.11.21. encounter24@yna.co.kr
(기사발신지=연합뉴스) 박원희 기자 = 1927년 시작된 쇼팽 피아노 콩쿠르는 세계 최고 권위의 피아노 경연 중 하나다.
피아노 거장 쇼팽의 음악을 놓고 겨루는 점, 상대적으로 긴 주기인 5년마다 열리는 점 등은 오랜 역사와 함께 이 대회의 위상을 높였다. 1960년 대회에서 우승한 마우리치오 폴리니를 비롯해 마르타 아르헤리치(1965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1975년) 등 그간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을 우승자로 배출했다는 점도 매회 이 경연을 주목하게 했다.
지난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과 협연한 중국계 미국인 피아니스트 에릭 루(27)는 그런 점에서 현재 가장 주목받는 피아니스트 중 한명이다. 두 번의 도전 끝에 지난달 열린 제19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연주자다.
루는 콩쿠르 우승 이후 첫 내한 무대에서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려줬다. 대회 결선 무대에서 연주했던 그 곡이다.
지휘봉은 미국 출신 거장 레너드 슬래트킨(81)이 잡았다. 디트로이트 교향악단과 리옹 국립 오케스트라의 명예 음악감독 등을 맡고 있는 그는 그래미상을 여섯 차례 수상하고 후보에 35번 오른 지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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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교향악단 정기연주회 포스터 [KBS 교향악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루는 차분하게 곡을 풀어나가는 모습이었다. 현악을 시작으로 각 파트의 역동적인 선율이 이어진 뒤, 피아노 차례가 되자 루는 레너트킨과 눈을 맞춘 후 연주를 시작했다. 곡의 극적인 대비나 역동성 대신 부드럽고 균형 잡힌 듯한 연주로 서서히 19살 쇼팽이 남긴 불꽃을 피우는 듯했다.
루의 이런 연주는 상대적으로 평온하고 애틋한 선율의 2악장에서 두드러졌다. 그는 목가를 들려주듯 온화하면서도 선명한 음으로 쇼팽의 순수한 서정을 드러냈다. 여독이 다소 덜 풀린 듯 흔들린 모습도 나타났지만, 피아노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화려한 기교를 수행하며 집중력 있게 연주를 마쳤다.
루가 앙코르곡으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를 들려주며 상대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선명한 연주의 매력을 다시 선사했다.
루는 22∼26일 울산, 통영, 서울 등지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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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쇼팽 콩쿠르 당시 피아니스트 에릭 루의 모습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KBS교향악단은 에릭 루와의 협연 외에도 다채로운 소리를 들려주며 관객을 매료시켰다.
협연에 앞서 연주한 신디 맥티 작곡의 '순환'에서는 유희적인 분위기로 다른 재미를 줬다. 현대 음악 작곡가이자 지휘자 슬래트킨의 부인인 신디 맥티는 이 곡의 오케스트라 버전을 남편에게 헌정했다. 이 곡이 국내에서 연주되는 건 이번 공연이 처음이었다.
타악기의 짧고 반복되는 리듬이 장난스러우면서도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가운데 베이스 등이 만들어내는 길게 지속되는 저음과 바이올린 등이 만들어내는 짧은 고음이 대비되며 관객을 몰입시켰다. 연주가 끝난 뒤 작곡가 맥티가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인사하며 국내 초연을 기렸다.
악단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 '1905년'에서는 폭풍 같은 합주와 고요함을 오갔다. 이 곡은 1905년 러시아 제정기 당시 사회 개혁을 요구한 민중이 황제의 군대에 학살당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악단은 피치카토(손가락으로 현을 뜯는 기법)로 불길한 전조와 애도를 드러내며 마음 한구석을 파고들다가, 관악과 타악까지 얹어진 강렬한 합주로 가슴 전체를 쿵쾅거리게 했다. 2023년 같은 곡을 연주하다가 찢어진 적이 있는 팀파니는 이날도 강렬함으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레너트킨은 맺고 끊음이 확실한, 절도 있는 지휘로 대비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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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교향악단 제820회 정기연주회 (서울=연합뉴스) 박원희 기자 =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KBS교향악단의 제820회 정기연주회에서 지휘자 레너드 슬래트킨과 단원들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5.11.21. encounter24@yna.co.kr
슬래트킨과 악단은 관객의 박수에 연신 화답했다. 이날 공연은 앙코르 없이 마쳤다.
KBS교향악단은 다음 달 정명훈이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합창'으로 올해 마지막 정기 연주회를 연다.
encounter2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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