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정원을 산책하는 (박대통령 육영수 여사)내외분". 사진 : 박목월, 『육영수여사』
□모란동백 [2]
백운 편집위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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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청와대 진입로를 향해 왠지 황송하다는 듯 시동 소리조차 줄이며 올라가고 있는 버스 안에서 곽남호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밀어냈다.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진입로를 줄곧 응시하면서 가슴은 사뭇 설레기 시작했다. S대학교 단과대학 수석 졸업 예정자들을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초대였다. 두 숨을 죽인 채 말이 없었다. 버스는 청와대 정문에서 통과 절차를 마치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자, 다들 내리지."
최 총장의 지시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학생들은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미리 준비된 식탁에 앉은 학생들은 어제의 열띤 반정부 데모를 벌이던 모습은 간데없이 들뜬 표정에 잔뜩 긴장을 담고 있었다.
“대통령 각하 내외분 들어오십니다."
누군가 비서로 보이는 사람의 외침에도 '대통령 각하 내외분 오시니까 모두 기립하여 맞을 준비를 하라'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고 교수와 학생들도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경직된 박수 소리가 터지는 가운데 박 대통령 내외가 입장하였다. 그때 곽남호의 타는 시선은 박 대통령 내외분의 모습에 어울려 매달려 있었다.
바로 저분이! 곽남호는 왠지 모를 탄성과 신음을 동시에 삼켰다. 저분이 박 대통령이란 말인가! TV나 신문 등에 거의 매일 같이 보아온 박대통령이었으나 실제 얼굴을 가까운 거리에서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학생들이 그토록 증오하며 반박정희, 반독재정권을 부르짖고 투쟁해 오던 그런 무서운 독재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너무나 의외의 모습에 남호는 아연하면서도 로봇처럼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그토록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던 독재자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왜소한 체구의 대통령 모습에 남호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열어 놓은 채 짐짓 허탈감에 빠졌다. 우리가 그토록 미워하며 그 거대한 독재 통치를 반대해 왔던 바로 그 장본인이, 이렇게도 작고 나약한 사람이었단 말인가. 얼굴은 새까맣고 주근깨가 많은, 사진에서 봐왔던 것처럼 깡마르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얼굴은 좀 차가운 인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남호는 박 대통령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 나온 여인에게 눈길이 끌려갔다. 하얀 갑사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여인은 육영수 여사였다.
”⋯.“
남호는 말없이 육여사에게 시선을 얹었다. 이미 숨을 훅 들이킨 상태로 모든 움직임이 정지되는 듯하였다. 참, 곱다는 느낌이 들었다. 석 달 전에 이승을 떠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호는 짜르르 울리는 콧등을 문지르며 쿡 엉덩이를 누르듯 자리에 앉았다. 일찍이 목련이요, 학이요, 청와대의 야당 등으로 들려오던 육여사의 모습은 과연 소담스럽게 피어난 한 송이 모란처럼 우아한 자태로 박대통령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부부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고 남호는 생각했다.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부인 육영수. 어떤 면에서 박대통령의 독재자 모습을 그의 부인 육영수가 한껏 가려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쪽의 부족한 부분을 또 한쪽에서 채워 주는, 뭐, 부부란 그런 것일까.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남호의 시선은 줄곧 육 여사에게 초점을 이루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훈시 후, 식사가 시작되었다. 왠지 뜨거운 마음으로 남호는 숟가락질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이따금 육여사의 고운 자태를 흘끔거리곤 하였다.
"김상철 학생.”
식사 도중 육 여사는 S대 법대 수석 졸업 예정자로 참석한 김상철을 불렀다. 놀란 듯 상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학생들은 왜 데모를 하죠?"
육 여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학생들의 숟가락질이 느릿해졌다. 청와대 안에서 그런 질문을 받으리라고는 김상철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청와대의 야당이라더니, 그런가! 남호는 상철을 주시하며 숟가락을 입술 가까이 갖다 댄 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여사님. 그건⋯.”
하고 육 여사의 질문을 대신 받아 적당히 기분 좋은 말로 대답하는 것은 최문환 S대 총장이었다. 아마 이 순간은 김상철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이 연민과 경멸, 실소를 금치 못했을 터였다. 학내에서 누구보다도 존경받는 노학자가 육여사 앞에 굽신거리는 광경에 학생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최 총장의 지루한 답변이 끝나기를 잠자코 기다리던 육 여사가 다시 말했다.
"김상철 학생, 말 좀 해봐요."
최 총장의 답변으로 다소 무안해져 있던 김상철이 마지못한 듯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여사님. 그건 학생들이⋯."
이번에는 법대 학장이 가로막고 나섰다. 아마도 이 순간은 육여사 자신이 가장 경멸스러워했는지 몰랐다. 그녀는 법대 학장의 답변이 끝나기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가 세 번째로 재촉했다.
"교수님들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 이젠 학생들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
짐짓 태연한 모습으로 얘기하고 있는 육여사를 보면서 남호는 자못 통쾌함을 느꼈다. 아부하는 자도 병이지만 아부가 아부인지를 모르는 지도자는 더욱 큰 병일 터. 그러나 그 아부를 뿌리칠 줄 아는 지도자의 용기와 결단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남호는 육여사에게 그런 느낌을 받았다. 확실히 그녀는 '청와대의 야당'다웠다. 그녀 자신도 자복했고 박대통령도 측근들에게 ‘청와대에 야당이 있으니 조심하시오.’라고 시인할 정도였다는 데, 과연 실감이 갔다. 아마도 육여사는 시위를 하는 학생들의 입을 통하여 대통령에게 살아 있는 바른 말을 전해 주고 싶어 했는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