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유신에 격분한 김대중 "단장의 심정으로 쓴 일기"(종합)
여섯권 수첩에 담긴 자필 일기 223편…신간 '김대중 망명일기'
김홍걸 씨 동교동 자택서 발견…박명림 교수 "민주주의 길에 많은 희생 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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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기사발신지=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1971년 4월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패한 김대중 신민당 후보는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고, 일본 정치인들과 만나기 위해 1972년 한 해 동안 일본을 자주 방문했다.
그해 8월 26일 쓴 일기에서 그는 '1975년에는 선거가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대선 유세 내내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 가능성을 제기하고, 우려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것이다.
"나는 이 일기를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쓴다. 그것은 오늘로 우리 조국의 민주주의가 형해(形骸)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1972년 10월 17일)
국회는 해산됐고, 헌법은 정지됐다. 새로운 개헌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진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김대중은 "청천벽력의 폭거요, 용서할 수 없는 반민주적 처사"라고 비판했다.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국내에 돌아갈지 망명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계엄령의 주역 박정희가 장악한 국내에 돌아가면 유신 정부에 검거돼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을 게 자명한 상황이었다.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돌며 반유신 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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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최근 출간된 '김대중 망명일기'(한길사)는 1972년 8월 3일부터 1973년 5월 11일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필로 쓴 일기 223편을 수록한 책이다. 2019년 이희호 여사 별세 이후 3남 김홍걸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에서 김 전 대통령이 쓴 여섯 권의 수첩을 발견했다. 김 이사장이 의원 시절 함께했던 보좌관과 유품을 정리하다가 쇼핑백에 담긴 서류와 수첩을 발견했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22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책 출간 간담회에서 "그게 거기 있는지 전혀 몰랐다. 까딱했으면 쓰레기통에 들어갈 수 있었다"며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수첩에는 고어(古語)가 많고 일본식 한자 표현도 다수 사용됐다. 김 이사장은 김대중도서관장 측에 판독을 부탁했고, 김대중평화회의 김정현 홍보위원장, 김대중평화센터 박한수 기획실장, 김대중도서관 장신기 박사 등이 내용 해석과 함께 친필 여부를 꼼꼼히 감정했다.
간담회에 동석한 박명림 김대중도서관장(연세대 교수)은 "김대중 전집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 관련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밀하게 정리했는데도, 이 일기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며 "읽으면서 중요한 사료라는 걸 느꼈다. 한 사회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민주주의로 가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하는가에 대한 사실을 절감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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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망명일기'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22일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망명일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박명림 김대중도서관장(왼쪽)과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출간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2025.7.22
kjhpress@yna.co.kr
책에는 당시 급박했던 국내외 정세가 생생하게 담겼다. 김 전 대통령은 일본, 미국, 다시 일본에 체류하면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를 일기에 상세히 적었다.
그는 망명 기간 내내 활발히 활동했다.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언론에 자신의 입장을 알렸고, 에드윈 라이샤워 하버드대 교수 등 여러 지식인과 접촉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전했다. 미국 각 대학을 순회하며 강연에 나서기도 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등 정치인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국제적인 반대 여론 형성에 이바지했다.
"케네디 의원은 나에게 '뉴요커' 지의 한국 관계 기사를 읽었다며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부탁하라, 한국보다 당신 개인에게 더욱 관심이 크다, 한국에 가더라도 연락을 끊지 말고 계속 연락하라고 하는 등 극진한 호의를 보여주었다."(1972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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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8월 피랍 후 5일 만에 기자회견 하는 김대중 [연합뉴스 자료사진]
4천만원에 달하는 빚더미 속에 아내와 세 아들을 남겨두고 홀로 망명한 가장의 불안과 고통,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기약 없는 망명 투쟁을 이어가는 정치가의 고뇌, 유신 독재의 압력과 회유에 흔들리는 옛 동지들의 소식, 개인적인 안위만을 생각하면서 독재에 신음하는 국내 현실을 외면하는 인사들에 대한 분노 등 사적인 내용도 책에 담겼다.
"본국에서 고생하는 가족과 옥중의 동지들을 생각하면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괴롭다."(1973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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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하는 김홍걸 이사장 (서울=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22일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망명일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3남 김홍걸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이사장(오른쪽)이 발언하고 있다. 2025.7.22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일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책은 자칫하면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 흔적도 없이 묻힐 수도 있었다. 그만큼 내밀한 기록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정치인 김대중이 아닌 '인간 김대중'에 관한 솔직한 모습도 담겼다. 타인에 대한 솔직한 평가, 죽음을 각오한 결기로 자기 운명과 삶에 맞서는 모습, 독재에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개탄, 이상적인 지도자상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 등 다양한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6·25 때 그리고 작년 5월 24일의 자동차 사고로 죽었던 몸이다. 22년이나 더 살았으며 그동안 많은 일도 했다. 이제 앞으로 무슨 고초와 변을 당하더라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동안의 생명에 감사하고 떳떳이 살아나가자."(1972년 11월 20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기획. 4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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