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로 만난 사도와 영조…"한국적 소재로 세계 겨냥"
사도세자 이야기에 현대음악 섞은 창작 뮤지컬 '쉐도우'
용포 대신 붉은 가죽 코트·강렬한 록 음악으로 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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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쉐도우' [블루스테이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기사발신지=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 "알고 있어 나, 오래 전 우리. 나는 널 사랑했었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물 한 모금 주지 않은 지 사흘째. 엄격해 보이기만 하던 영조는 뒤주 곁에서 슬프게 읊조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극적인 부자 관계로 손꼽히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록 음악과 시간 여행이라는 요소를 섞어 풀어낸 뮤지컬 '쉐도우'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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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쉐도우' [블루스테이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9일 서울 강남구 백암아트홀에서 열린 2인극 뮤지컬 '쉐도우' 프레스콜에서는 사도와 영조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현대적인 음악으로 풀어낸 무대가 연달아 이어졌다.
둘의 갈등이 고조될 때는 록 사운드가 공간을 가득 채웠고, 때로는 발랄한 팝 음악, 감성적인 알앤비(R&B)도 등장했다.
가장 인상적인 무대는 맨 처음 선보인 '이모 프롬 더 이스트'다. 강렬한 밴드 음악과 깜빡이는 눈을 확대한 배경 영상으로 시선을 집중시킨 뒤 사도가 스탠딩 마이크를 잡고 '이모 프롬 더 이스트'라는 곡을 선보이며 좌중을 압도한다.
허재인 작가는 "미국에서는 감정이 억눌린 사춘기 아이들이 자주 듣는 음악 장르가 '이모록'(Emo Rock·하드코어 펑크 계열 록 음악)이라고 한다"며 "사도의 억눌린 감정선을 중심으로 가사를 쓰면서 이모록이 이와 맞닿아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강렬한 노래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빠진 젊은 영조와 그에게 조언하는 사도가 부르는 '크러쉬'는 산뜻한 팝 음악이다.
작곡을 맡은 앤디 로닌선은 "여러 가지 색깔 물감으로 그림을 채색하듯이, 우리도 알앤비, 이모록, 컨추리록 등 다양한 장르를 섞어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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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쉐도우' [블루스테이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는 이미 국내에서 영화와 드라마로 많이 다뤄졌다.
뮤지컬 '쉐도우'만의 차별점은 상상력을 가미해 시간여행이라는 요소를 넣었다는 것이다.
형벌의 공간인 뒤주를 타임머신으로 설정하고, 사도가 시간여행을 통해 젊은 시절의 영조와 만나 우정을 쌓는 이야기가 담긴다.
둘이 왕과 세자로 만나지 않고, 친구였다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사랑했을 것이라는 메시지도 던진다.
부모 자식 관계라는 보편적인 이야기가 밑바탕에 있는 만큼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공감받을 수 있다고 제작진은 기대했다.
김현준 연출은 "한국적인 소재지만, 처음부터 글로벌하게 나가고 싶어서 만든 뮤지컬"이라며 "사도세자 이야기를 모르는 글로벌 관객도 '아빠가 아들을 쌀통에 가두네' 하면서 새롭게 볼 수 있고, 또 부모·자식의 관계에 대해서도 성찰해 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영조 역에 트리플 캐스팅된 배우 한지상은 "대본과 음악을 들었을 때 '되겠다'라는 세 글자가 머리에 떠올랐다"며 "이 작품에는 다양한 시간대, 상황, 감정, 음악이 존재해서 이를 아우를 수 있도록 표현에 집중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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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쉐도우' [블루스테이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쉐도우'는 총 3년에 걸쳐 만든 창작 뮤지컬이다. 작가와 작곡가, 연출은 물론 배우들도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교환하며 이야기를 완성했다.
영조 역의 김찬호 배우는 "영조의 넘버(뮤지컬 노래) '살아'는 원래 사도가 부르기로 했지만, 영조가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의견을 냈고 제작진이 수용해줬다"고 설명했다.
실험적인 연출도 눈에 띈다.
조선시대 인물들을 연기하지만, 영조는 용포 대신 붉은 가죽 코트를 휘날리며 등장하고, 사도는 사춘기 청소년처럼 풀어헤친 흰옷을 걸친다.
록 페스티벌처럼 사도와 영조가 스탠딩 마이크를 쥐고 무대 끝에서 열창하거나 '록 사인'(검지와 소지를 편 손 모양)을 표현하기도 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 때 바닥에 놓인 카메라, 이른바 '뒤주 캠'을 바라보면서 노래하는데, 그 얼굴이 무대 배경에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무대는 단 두 명이 채우지만, 이처럼 배경 화면 연출과 강렬한 음향 때문에 한시도 비어있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사도 역은 진호, 신은총, 조용휘가, 영조 역은 한지상, 박민성, 김찬호가 맡았다.
뮤지컬 '쉐도우'는 지난 5일 개막했고 다음 달 26일까지 공연을 이어간다.
heev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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