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블랙리스트'에 묻힌 이름 790명…80년 만에 빛 비춥니다
'약명부' 37명 독립유공자 신청…"국가폭력 반복 막을 반면교사"
광복 직전까지 日 감시 대상이었지만 169명만 국가 인정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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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요시찰인 약명부(왼쪽)와 고(故) 신승혁 선생 관련 기록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기사발신지=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 "키 5척 3촌(약 160㎝). 머리카락은 짧게 깎음. 목소리가 형형함. 오른쪽 눈 아래에서 윗입술까지 약 2촌(6㎝) 길이의 상흔이 있음."
1945년 3∼4월께 일제가 작성한 '조선인 요시찰인 약명부'(이하 약명부) 속 독립운동가 이규창(1913∼2005) 선생에 관한 기록이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우당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창은 1935년 친일파를 처단했다가 10년간 옥살이를 하고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광복 80주년을 사흘 앞둔 지난 12일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난 권시용(50) 선임연구원은 "얼굴 흉터 등 인상착의가 자세하게 기록돼있다"며 "형무소 수감자에 대해서까지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2011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한 권 연구원은 2023년 약명부를 번역해 발간하는 등 잊힌 독립운동가를 발굴해온 사학자다.
일제는 1940년 중반부터 전쟁을 위해 조선인 동화를 극대화하는 '내선일체' 정책을 본격 추진했다. 조선총독부는 '요시찰 인물'에 대한 노골적 단속이 어려워지자 약명부를 만들어 경찰서 등에 내려보냈다.
식민 통치에 저항하거나 방해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인물들은 빠짐없이 약명부에 실렸다. 약명부는 전국 각 도에서 작성됐으나 지금은 전남·전북·경남·충남·함북 등 5개도만이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돼있다.
일제가 약명부를 통해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인물은 모두 790명. 이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국가의 인정을 받은 사람은 169명에 불과하다.
후손을 남기지 못한 이들도 있겠으나 약명부에 수록된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영향이 더 크다. 광복 후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들도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소는 지난 6월 전남 지역 약명부에 수록된 59명을 조사해 이 중 37명에 대해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친일 정황이 있는 13명 외에도 월북·납북 등 광복 후 행적이 논란이 될 9명에 대해선 신청을 보류했다.
권 연구원은 "광복 직전까지 국내에서 일제와 치열하게 싸운 건 주로 사회주의자의 몫이었지만 해방 이후 행적이 불확실하다면 (보훈 당국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있다"며 "1945년 8월 15일 이후의 행적이 독립운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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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약명부 번역본 [촬영 최원정]
권 연구원은 "비록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많이 쓰였던 분"이라며 '신승혁'이라는 이름을 가리키기도 했다. 약명부 속 그의 이름에는 사선 두 줄이 그어졌고 흐릿한 글씨로 '4월 1일 사망'이라 적혔다.
일제는 신승혁에 대해 '조선공산당 재건에 광분 중 검거하여 취조 중'이라고 적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숨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없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다.
약명부에는 뜻밖의 인물들도 눈에 띈다. 중국에서 일본군 위안소를 운영했거나 관동군 등에서 활동하며 밀정 노릇을 한 친일파도 여럿 이름을 올린 것이다.
권 연구원은 "한때 일제에 저항했으나 1930년대 후반을 지나며 독립에 회의를 품고 전향한 이들로 추정된다"며 "일제는 끝까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감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제의 약명부는 독재 정권의 '민간인 사찰', 민주화 이후 '블랙리스트'로 끈질긴 명맥을 이어왔으며, 이 같은 국가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것이 권 연구원의 생각이다.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을 관리하고 싶다는 욕망은 권력자가 버리기 힘든 유혹인 것 같아요. 민주화된 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블랙리스트라는 말이 떠돌고 있잖아요. 이 어두운 유산을 극복할 수 있도록 약명부가 반면교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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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선임연구원 [촬영 최원정]
away77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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