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 무상(淨衆無相, 684~762) 스님_ 중국 베이징 홍라사에 모셔진 500나한 중 정중무상 존자상


1. 왕가에서 태어난 출가자

정중 무상 스님은 신라 제33대 성덕왕(702–737)의 셋째 아들이자 김씨 성을 가진 왕자였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왕실에서 태어난 그에게 출가의 동기를 준 것은 뜻밖에도 한 여인의 결심이었다. 손위 누나가 시집을 강요받자 스스로 얼굴을 찌르며 출가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이를 본 무상은 “여인도 저리하거늘 사내된 내가 어찌 법을 깨치지 않으랴” 결심을 굳혔다. 그리하여 군남사(群南寺)에서 머리를 깎았다.

2. 왕자 승려의 역사적 맥락

신라와 고려 시대에 왕족의 출가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왕위 계승에서 멀어진 왕자들이 정치적 소용돌이를 피하거나, 왕실의 불교 후원 정책에 따라 출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무상의 경우는 개인적 신심과 가계의 영향이 뚜렷하다.

3. 당나라로 향한 발걸음

728년, 44세가 된 무상은 이미 신라에서 깊은 수행을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더 넓은 불법을 구하고자 당나라로 건너갔다. 장안의 선정사에 머문 뒤, 사천성의 덕순사 처적 선사를 찾아가 법을 구했다. 거듭된 거절 끝에 손가락을 태우는 ‘소지공양’으로 자신의 결심을 보여 스승의 문하에 들었고, 가사와 법을 이어받으며 ‘무상(無相)’이라는 호를 받았다.

4. 정중종(淨衆宗)의 개조

무상은 사천성 성도의 정중사에 주석하며 20여 년간 교화했다. 그의 법맥은 사천 지방의 독자적 선종 계보로 자리잡았고, 후대에 ‘정중종의 개조’로 불렸다.

그는 매년 대중 법회에서 인성염불(引聲念佛)로 번뇌를 가라앉히게 하고, 무억(無憶)·무념(無念)·막망(莫妄)의 3구 설법을 전했다. 이는 계·정·혜 삼학에 대응하는 간결하고도 실천적인 수행 지침이었다.

5. 신이와 존경

무상은 때로는 호랑이와 함께 지내는 신이한 고승으로 묘사된다. 사람들의 귀의와 보시가 이어졌으며, 심지어 그를 의심하던 지방관조차 회오리바람 속에서 무릎 꿇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당 현종과도 인연이 깊어, 안사의 난 후 성도로 온 황제는 정중사에 ‘대성자사(大聖慈寺)’라는 현판을 내리고 사찰을 크게 중건했다.

6. 티베트 불교와의 인연

무상은 티베트에 최초로 선(禪)을 전한 인물로 재평가받고 있다. 티베트 사서 바쎄(sBa bzhed)에 따르면, 그는 티베트 왕자 티송 데첸(Trisong Detsen)에게 불교를 전하는 데 결정적인 예언과 가르침을 주었다. 이는 마하연 이전에 이미 무상이 티베트에 선법을 전했다는 증거로, 불교 전래사의 중요한 수정 포인트가 되었다.

정중무상선사 부도탑


7. 마조와의 관계

중국 고승 규봉 종밀과 근현대 학자 호적은 마조 도일(709–788)이 무상의 제자였다는 설을 제기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무상이 중국 선종사와 신라 9산선문에 간접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8. 열반

762년, 무상은 제자들에게 “새 옷을 주어라, 목욕하고 싶다”고 한 뒤, 자시(밤 11시경)에 좌선한 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79세, 사천에 머문 지 34년 만이었다. 역대법보기는 그의 열반을 ‘천지가 빛을 잃고 강물이 마른 날’로 묘사하며, 그를 500나한 가운데 한 분으로 모셨다.

◆무상의 유산

정중종 창시 – 사천 지방의 독자적인 선 계파를 세워 중국 선종의 지형을 넓혔다.

인성염불·3구 설법 – 단순하고도 깊이 있는 수행 지침으로 대중을 제도했다.

티베트 불교의 문을 연 고승 – 티송 데첸 시대 불교 공인의 기반을 마련했다.

국제적 영향 – 신라인 출신으로 중국과 티베트 불교사에 동시에 기록된 보기 드문 인물.

📜 정중 무상은

왕자였으나 권력을 버리고,

스승 앞에서 손가락을 태워 서원을 세웠으며,

사천의 한 절에서 세계 불교사의 흐름을 바꾼

“국경 없는 선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