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호의 월요이야기 제117호(2025.10.20.)]
- 피는 물보다 진하다 -
2024년 한글의 세계화를 위해 미국 미네소타 주를 방문했을 때,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미군을 보냈고, 가장 많은 전사자가 나왔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전쟁고아를 가장 많이 입양한 주가 ‘미네소타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에 파병된 미군 참전 용사들을 만났고, 입양된 한국인들을 만났습니다.
입양인들의 눈물 어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부모를 찾고 싶어 했고, 고국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그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종시로 돌아온 나는 국내외 입양인, 보호가 필요한 아동 및 보호 종료 아동을 위한 교육 문화 사업을 펼치는 (사)세종 디아스포라 허브를 떠올렸습니다.
비영리법인 (사)세종 디아스포라 허브를 통해 국외 입양인 모국 방문, 가족 찾기, 한국 정착에 대한 지원활동을 펼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결성된 (사)세종 디아스포라 허브(대표 남진석,이규순,서만철)와 미국 미네소타주의 국외 입양인단체인 아답티허브(Adaptee hub)가 손을 잡고 입양인들의 모국 방문을 추진했습니다.
드디어 한국을 떠난 지 40~50년 만에 입양인들이 모국인 대한민국 세종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소식이 닿아 60-70년대 서독에 파견되었던 재독 간호사들도 이 모임에 합류했습니다.
지난 주 10월 10일 연동면 우보고택 앞마당에는 왁자지껄 잔치가 열렸습니다.
비가 내렸지만, 저녁 천막 안에는 40여 명의 손님들이 웃고 박수를 치며 하나가 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입양인 11명과 독일로 파견되었던 간호사분들 13명, 그리고 이들을 초대하고 환영하는 사람들.
입양인들은 4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하였고, 간호사분들은 다들 70대와 80대에 들어선 분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을 처음으로 와 봤다는 입양인 멜리사 부시(Melissa Bush) 씨의 말이 제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50대인 그녀는 “이제까지 한국은 나의 정체성에서 무시해야 했던 부분이었다. 입양되어서 가족, 친구, 사회 속에 속하기 위해 철저하게 그들 속에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한국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내가 버림받은 곳이라 생각했다.”고 말을 꺼냈습니다.
어릴 적 기억도 나지 않는 조국에서 그 먼 나라로 입양을 간 그녀에게 한국은 잊고 싶은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에 오고 나서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 큰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초청해 준 한국 분들로 인해 나의 뿌리가 되는 한국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었다. 감사하다”며 “앞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새로운 여정에 함께해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해외 입양의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6.25가 발발하고 전쟁고아가 급격히 늘어나자 정부는 해외 입양을 통해 아동복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시작은 전쟁고아들이었지만 60년대 들어서면서 미혼모의 자녀나, 심지어 가정 사정이 어려운 아이들까지 고아로 서류를 바꿔 입양을 보내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입양되었던지 ‘입양 산업’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고, 한국은 ‘아기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그동안 얼굴이 다른 부모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 입양아들은 얼마나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에 대해 회의하며 번민하고 외로웠을까요?
얼마나 그들의 친부모를 원망했겠으며, 한국인이면서 한국도 한국어도 모르는 자신들을 보며 얼마나 스스로 방황하고 괴로웠을까요?
한국에 와서 남대문 시장에서 남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다는 그들.
누구나 자신들과 같은 피부색과 눈과 얼굴을 하고, 자신들에게 아무도 이상한 눈길을 주지 않을 때 느끼는 동질감과 정체성, 그 평온함.
같은 눈높이에서 그들과 포옹했을 때 품에서 떨어지지 않던 그들.
그러면서도 낯설음에 어색해 하며 무표정이기까지 한 어떤 입양인.
그들의 이야기에 눈물이 고이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국력 6위, GDP 세계 12위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K-컬쳐가 세계를 사로잡았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위상은 대단히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한국도, 한국어도, K-컬쳐도 전혀 자신과는 상관없는 한국인, 해외 입양인들.
저는 높아진 국격에 맞게 이제 우리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입양인들에게 그들의 모국, 대한민국의 따뜻한 품과 자부심을 선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재외동포청과 함께 입양인들을 위한 모국 방문을 하는 ‘해외입양인 초대의 날’, ‘한국어 교육 사업’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글 문화도시 세종시에서 한국 입양인들을 위한 숙박형 한국어 교육기관인 세종학당을 비롯해 다양한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을 구상코자 합니다.
세종에서 진정한 그들의 모국을 찾고,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다른 환경에서 살았어도 피는 물보다 진한 겁니다.
해외 입양인들 스스로도 그것을 알게 될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 세종특별자치시장 최민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