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키메라의 땅” -
두 가지 이상의 유전자 또는 세포가 합쳐진 생물학적 개체를 “키메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사피엔스라는 말은 <지적인>, <신중한>, <이성적인> 더 단순하게는 <현명한>이라는 라틴어 사피오(sapio)인데 대체 얼마나 오만하면 자신이 속한 종을 사피엔스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요?”
젊은 과학자 앨리스 카메러는 자신들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에 빠진 인류는 곧 자멸해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인류의 생존을 위해 인간과 다른 종의 이종교배인 혼종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비밀스런 연구가 극심한 반대론자들에게 부닥치자 국제 우주정거장으로 피신하여 연구를 이어갑니다.
어리석은 인류는 결국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에 그녀는 3종의 키메라의 배아를 들고 지구로 귀환합니다.
두더지와 인간의 혼종으로 땅 속에서 살아가는 능력을 가진 지중인간(Diggers 디거),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는, 인간과 돌고래의 혼종인 수중인간(Nautics 노틱),
하늘을 날 수 있는, 인간과 박쥐의 혼종인 공중인간(Aerials 에어리얼)입니다.
DNA의 앞 글자들로 이름을 붙인 키메라들은 물, 흙, 공기라는 3요소를 손에 넣어 어디서든 생존할 수 있는 인류라는 종의 생존을 보장하려 했습니다.
키메라들은 인간들과 만나 공존하게 됩니다.
마치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이 공존했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존재로 성장합니다.
하지만 기존 인류와의 관계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은 키메라를 위협적인 존재로 보고, 어떤 인간은 다음 단계 진화의 희망으로 받아들입니다.
인류는 쇠퇴해 가지만, 혼종들은 새로운 진화를 일으킵니다.
지구의 자연은 새로운 긴장 속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긴장 속에서 핵전쟁까지 일어나며, 인류와 키메라 모두 큰 낭패를 겪게 됩니다.
승리도 화해도 없습니다.
결국 앨리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는 듯 했습니다.
실망과 자조에 빠진 작가는 말합니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고 많은 종이 소멸했으나 일부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동물들에게는 형태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슴은 털이 무성해졌고, 토끼는 더 빨라졌으며, 개구리는 검게 변하고, 거미는 냄새를 더 강하게 풍기고, 식물들은 방사능으로 손상된 DNA를 지속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특수 효소들을 발달시켰습니다.”
진화를 지속시키기 위해 진화를 촉진시키는 시도들은 성공할 것인가?
“다음 인류는 과연 누구일까요? 여전히 우리, 사피엔스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만든, 우리보다 더 적응력 있는 새로운 존재일까요?”
작가는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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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최근 세종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키메라의 땅”에서 작가가 눈으로 묻는 이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 보았습니다.
키메라.
그의 혼종 키메라는 우리 인류가 그렇게 온 에너지를 쏟아 개발하고 있는 AI(인공지능)라고 읽혔습니다.
인류는 스스로 끝없이 진화하고자 합니다. 생물학적 진화는 기다릴 수 없이 시간이 걸리니, 과학적 디지털의 사이보그 진화를 시도하며 스스로를 전능화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현명한 인간)에서 호모 데우스(신神적 인간)를 넘보며 AI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곧, 또는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AI는 우리의 뇌 속에 파고들어 살고 있습니다.
AI를 활용하지 않는 인간은 곧 네안데르탈인이 될지 모릅니다.
AI는 혼종 인간, 키메라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불가역(뒤로 돌아갈 수 없는)의 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키메라의 땅”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중얼거립니다.
‘자연의 진화는 자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 듯 하다고 회의하면서, 결국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인간의 시도는 무모하고 무의미한 것이라고 고개를 젓습니다. 그러다가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리는 나비를 보고 가끔은 그 나비를 집게로 구해주기도 하는 것도 보람 있는 것 아닌가라고 중얼거립니다.
그의 소설과 공연은 진화와 공존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우리가 만든 기술과 창조물이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AI 시대의 새로운 문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까요?
과연 우리가 스스로 변해야 할까요? 혹은 거부해야 할까요?
“다음 인류는 누구일까?”
새로운 진화의 출발선을 보여주며, “과연 우리는 이런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기며 “키메라의 땅”은 끝을 맺습니다.
AI 시대를 맞아 도심 속의 데이터 센터를 둘러싼 각 지역의 주민들과 지방정부들 간의 논란을 보면서 강하게 들고 있는 저의 고민이자 숙제가 “키메라의 땅”에 짙게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 세종특별자치시장 최민호 -